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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솔로숀 Mar 14. 2023

기획으로 먹고살려면

대행사 다니는 쌍둥이엄맙니다


나에게 잘 쓴 기획안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잘 읽히고, 하겠다는 일이 그려지고, 다음 장이 궁금한 것. 그렇게 쓰는 것만 내 소관이고 결과는 들은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채택이 안되더라도 하루 이상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다. 근데 이번엔 좀처럼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오랜만에 ‘시원한 예산’의 제안 요청이었다. PT를 진행한 그다음 날 결과가 나오는, 절차마저 시원한 비딩.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수주에 실패했다.


참여한다는 대행사가 족히 스무 군데는 된다고 들었다. 그래도 ‘엉, 해볼 만 해‘라고 생각했던 건 근자감이 아니었다. ‘메시지’도 ‘제작물’도 잘 나왔다. 팀원들은 나왔으면 하는 시간에 아이디어를 가래떡처럼 뽑아냈고 그걸 바탕으로 풀어가는 스토리는 결론을 아는 나조차 흥미로웠다.


‘PT는 쇼타임이야’

첫 회사 대표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발표자는 배우, 기획자는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관점에서 아주 좋은 대본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짧은 일정에 여러 개 미션이 있어서 이거 풀고 나면 다음, 다음 거 풀고 나면 또 다음게 나오는 마트료시카 같은 일이더라. 우리 팀은 이 건을 킥오프 하기 전 주에 이미 두 건의 제안 마감을 쳐낸 상태였는데도. 우리는 ‘일을 되게 하지’ 하는 생각에 연일 야근, 공휴일에도 일을 했다. 그 결과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내려고 나는 출퇴근길에도 문서를 돌려보고 메모를 해댔다. 그렇게 유난히도 일을 해서 나온 맘에 드는 기획안이었다.


그리고 제안서를 제출한 며칠 뒤 회신을 받았다

- 짧은 일정에 좋은 제안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안타깝게도 금번 제안에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향후 좋은 인연으로 만나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메일을 읽고 하루 이틀 동안

- 이놈의 일, 이제 그만둘 때 됐지 아 여기가 터닝 포인트인가 보다. 라며 분했다가

- 아니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는데? 아쉬운 부분이 하나도 없거든! 이라며 억울해했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팀원들한테는 ‘우리 겁나 잘했어. 그들은 몰랐지만 내가 알아’라고 말해놓고 나는 지웠던 이직 앱을 다시 다운로드하는 잡코리아 광고 같은 짓도 했다.

- 얘들아 버텨 (아니 버튀어!!!)


 대행사 10년 차, 제안서 원투데이 쓰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결과에 이렇게 휘청이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던 며칠이었다.




아가들 어린이집 졸업 여행을 취소했다.


 제안 킥오프 미팅을 하고 일정 조율을 하면서 아이들 어린이집 졸업 기념으로 가려던 여행 일정을 취소했다. 어린이집 졸업과 유치원 입학이 제안 일정의 정중앙을 관통했고 일적으로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시키지도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내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아이들 땡땡이 같이 쳐주는 엄마’였는데 땡땡이는 고사하고, 유치원 입학 전 가정 보육을 하는 약 5일 동안 아이들이 깨 있을 때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아이들 유치원 입학 전 날이 삼일절이었는데, 입학 날 새벽까지 일을 했다. 첫째가 등원길에 하도 울어서 한 시간 겨우 붙인 눈을 비비며 아이들 머리를 겨우 묶어주고 다시 기절했더랬다. 안방에서 눈을 비비며 나오는 나를 보고 ‘어 엄마 있었어?’라고 하더라.


요즘 아이들이 자기 전에 남편이랑 동요를 부르는데

그 가사는 또 이렇다.

-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회사 갔어~




생존을 위해 하기로 한

최소한의 일정도 포기했다


일정이 짧고, 요청 사항은 많은 광폭하게 쓰는 제안을 할 때 두 가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첫 번째는 운동이다.

 일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체력을 다지기 위해 생존 운동을 하는 편인데. 그것은 근육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숨쉬기에 집중‘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제안서 쓰는게 일인데 제안 할 때마다 운동 안하면 운동 안하겠다는거라.. 되도록 마감때문에 운동을 미루지 말자고 했지만 이번에 간 필라테스 수업이 3주 만이었다. 어쩐지 제안 하나를 마치고 나면 숨이 가쁘다.


두 번째는 책 읽기다.

 책 읽기는 내가 하는 몇 개 안 되는 취미 중에서 가장 고독한 것인데, 육아하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절대적으로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생존을 위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미 처리해야 하는 정보의 양이 많은 이 시기엔 고독이고 자시고 뭘 보는게 싫다. 눈을 감는 시간이 필요하다. 눈의 피로에도 뇌의 피로에도.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일만 해서 그랬단 거다. 일에 목을 매달았으니 결과에 연연할 수밖에.


기획으로 먹고살려면, 계속 쓸 수 있어야 하는데 한번 쓰고 말 것처럼 했다. 매일 가쁜 숨을 쉬며 지금 제일 예쁜 시기인 토끼 같은 아이들에게 엄마 노릇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책도 못 읽었으니.


일이라는 파도를 타야 하는데,
많은 걸 이고 지고 파도에 휘말려버렸다.
하수다.


되면 참말로 즐거웠겠으나 잘됐으면 안 했을 생각인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다시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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