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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y Apr 08. 2022

서울의 작은 브루클린,  해방촌 오거리

 5개의 교차로에 깃든 기억

내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남산 계단 아래에 위치한 작은 집에서부터 시작한다.
작은 체구에 시원한 큰 눈을 가진 어린 날의 나는 소꿉친구와 동네 온 곳을 누비기에 바빴다.

붉은 벽돌 빌라들이 집대성한 작은 마을,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잦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이 마을, 해방촌 오거리를 나는 서울의 작은 브루클린이라 부르기로 했다.

소꿉친구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짱구네 책방' 은 오거리에 있던 작은 상점들 중 내가 보물처럼 여기던 장소였다. 이 책방은 넓지 않은 평수였지만 모든 장르를 섭렵한 만화책과 DVD가 책장 상하좌우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어린아이의 글로리는 고개를 들고 눈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책방 미로를 여행했고, 그 순간 즐거운 멀미를 느꼈다. 2층에는 신기한 구조로 소꿉친구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올라가려면 아슬아슬한 경사의 철계단을 거쳐야 했다. 철계단 특유의 우당탕탕 발소리, 장사에 방해된다고 머리를 쥐어박는 어머니셨지만 매번 돌아가는 길에 천 원 한 장 꼭 손에 쥐어 주셨다. 친구와 나는 어떻게 하면 천 원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의 주제로 귀여운 토론을 벌였고, 만장일치로 교회 앞 슈퍼로 뛰어갔다.

마이구미와 새콤달콤 포도맛을 작은 손가락에 나눠 옮겨 담고 당돌하게 동네를 전전했던, 그 시절 우리


S#1 내가 사랑한 서울의 작은 브루크린, 해방촌 오거리

서울의 환상적인 경치를 보기 위해서는 녹색 버스의 힘겨운 엑셀질을 견뎌내야만 이곳에 다다를 수 있다.

 남산 바로 아래 위치한 마을만큼이나, 높은 지대의 해방촌은 매서운 장마철에도 빗물의 결이 아래로 흘러 안전하지만 혹한의 추위에는 뼈도 시릴 만큼 바람에 노출되기 쉬운 일명 '해베리아 존'이다.

소월길 북쪽으로 올라가면 '남산 순환도로'가 보인다. 왼쪽은 남대문, 오른쪽은 강남으로 통하는 제법 눈치 좋은 접근성을 자랑한다. 도로의 곡선을 타고 부드럽게 일렁이는 꽃들이 만개한 봄, 초연한 푸르름이 춤을 추는 여름, 단내 솔솔 풍기는 주홍빛 남산의 가을, 수선스러운 차들 사이에 무게있는 침묵을 지키는 겨울.

사계절의 잔상이 해방촌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눌러앉는다. 누구나 남산 순환도로를 순행하는 시내버스에 올라타면 내가 사는 '서울의 계절'에 동화된다.

소월길 서쪽과 남쪽의 교차로는 '후암동'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해방촌 오거리'와 '후암동'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접점을 이룬 마을로 닮은 구석도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해방촌 토박이 입장에서 후암동은 긴 오르막길을 사이로 엄연히 다른 동네였다. 그래서 내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기 전까지 자주 왕래하지는 않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동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후암동'이 가진 매력에 흠뻑 젖어 버렸다. 내 둘도 없는 단짝 친구도 후암동 토박이인데 얘는 아직까지도 좀처럼 동네에서 벗어나질 못 한다.

소월길 동쪽을 타면 익숙한 경리단길을 지나 이태원으로 통하는 큰 길가가 보인다. 경리단길을 타고 쭉 내려가면 철조망이 달린 벽들로 둘러 쌓인 미군기지가 나온다. 외국인들과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건 해방촌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다. 좁은 도로 사이로 즐비한 카페와 식당들이 이국적인 커뮤니티를 이루고,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브런치를 먹는 모습도 보인다. 붉은 벽돌들이 성곽처럼 겹쳐서 쌓여 있는 해방촌 오거리와 남산타워 빛의 슬라이드가 함께 만나 어우러지는 이 동네의 광경은 전국 어디에도 없는 독특함을 자아낸다.

S#2 해방촌과 브루클린 틀린 그림 찾기

그러나 내가 사랑한 해방촌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미국 뉴욕시의 브루클린은 뉴욕시 맨해튼의 살인적인 물가를 이기지 못한 빈국의 이민자나 화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현재에는 유럽계 이민자들이 빠져나가고, 남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미국 흑인, 히스패닉계 미국인들이 유입되면서 이전과 다른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브루클린 브릿지부터 붉은 벽돌 건물들의 장렬한 연결과 이국적인 거리의 풍경, 맨해튼과 대비되는 빈민층의 카운티로 비치던 브루클린은 현재 맨해튼 다음으로 인구 밀집도가 높은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미드 과몰입자인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유독 브루클린이나 퀸스에 열광했던 이유도 이 같은 이유에서 시작된 걸까? 마을의 역사도, 흔적도, 외관도 어딘가 해방촌과 닮은 먼 나라의 이 마을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어떤 초심으로 삶에 정착했을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내가 봐왔던, 서울의 작은 브루클린의 해방촌 사람들이 세상과 다정한 사투를 벌였듯, 커다란 브루클린의 사람들도 이들과 비슷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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