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lory May 05. 2022

오후 4시에 하는 샤워가 좋다

몸, 오후 4시, 샤워, 초록빛의 스펙트럼


바람이 차 몸이 으슬거리는 새벽녘에 아빠는 일어나 샤워를 하고

바닥에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곤히 잠든 언니를 깨운다.

단잠을 깨야 되는 시간이 다소 억척스럽고 모질지만 

어쩔 도리가 없으니, 눈을 몇 번 껌뻑이다 좀비처럼 화장실로 가 문을 쾅.

우리의 아침은 대개 이렇다.

그때부터 다시 보일러는 안간힘을 쓰고, 뜨겁게 데워진 물과 수증기는 샤워실의 온기를 채운다.

바닥에 철썩이는 물소리는 집 안 가득 메우는, 새로운 날을 알리는 적당한 고통과 소음. 


새들이 기지개를 켜고 사방팔방 짹짹이는 자연의 순리,

시간에 존속될 수 밖에 없는 생명의 생체리듬은 한계를 모르게 명확하다 

그렇게 샤워기의 물이 바닥을 쓸어내리는 경쾌한? 소리를 잠결에 듣다 보면 

어쩐 일인지 문득,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한 호흡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의 감각. 

되려,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생각이 드는 절충된 기쁨. 


잠에서 애매모호하게 깨어나 날이 곤두세워진 감각으로 듣게 된 날에도

이른 새벽의 잔잔한 무게 안에서 가볍게 운동하는 진동

깨어난 사람들에게 전제된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

유유히 새벽녘을 기는 에너지의 함축들은 변화무쌍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내 시작은 남들보다 조금 늦다

9시 출근 6시 퇴근을 해야 되는 직장인도 학생도 아닌 나는 시간의 씀씀이가 자유로운 편이다

이미 샤워부스의 습기가 건조되고 수도꼭지에 고여있던 마지막 물방울 마저 바닥에 떨어질 때

차츰차츰 일어나 속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욕실에 들어간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몸에 물을 적시게 되는 순간은 의외로 에너제틱하다 

 데운 물로, 여전히 잠에 든 예민한 세포를 깨워야 하는 새벽과 달리

모든 정신이 선명하고 몸에 적당한 활기가 퍼져있는 오후에는 자연스러운 냉수 샤워도 거뜬하다

욕실에 딸려있는 작은 창문에는 바깥의 빛이 퍼포먼스처럼 욕실을 비춘다

일반 샤워기보다 해바라기 헤드를 선호하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오후 4시의 햇살과 다중의 물줄기가 만나 신비롭고 투명한 자태를 만들어내면 

가끔은 귀찮다고 느낄 만큼 하루의 노동으로 치부했던 샤워실에서의 시간이 형형색색으로 바뀐다

바디로션

종교의 의식에 물과 씻어내는 행위를 빼놓지 않는 건

해소와 정화, 불순한 것을 씻어내고 깨끗하고 온연한 기로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기도해서이다.

위생적으로 청결하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시간을 들여 몸을 씻지 않은 날은 무력감을 동반한다. 샤워는 노동이 아니라 감각의 행위다.

피부 한 결 한결 조심스럽게 닦아 내고, 펌핑한 샴푸의 라벤더 향기로 머리를 마사지해가며 

반복적인 행동에 무색해진 감각들을 조금씩 되살려보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서울의 작은 브루클린,  해방촌 오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