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동물농장』과 『1984』 의 저자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다. 그가 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는 '블레어'가 '오웰'이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한 묘사 중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그가 어릴 적부터 '불쾌한 사실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식민지 경찰'로 5년간 근무하며 권위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불쾌한 사실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그런 것도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문자 그대로의 표현에 따르면, 이 낯선 능력은 크게 두 측면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먼저, 이는 다른 사람보다 더 수월하게 불쾌한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권력의 오남용에 대해 비판해 온 작가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이때의 '불쾌'는 개인적인 취향의 차원이 아니라 권력의 잘못된 사용에서 비롯하는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다시 말해, 모른다면 모를까, 알고 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쾌해할 만한 부당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동물농장』과 『1984』는 이러한 맥락에서 '불쾌'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시공간의 맥락을 초월하여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
나아가, 위의 맥락에서 '직면'한다는 표현은 일단 인지한 '불쾌한 사실'을 회피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에서 '불쾌한 사실'을 인지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다양한 반응을 선택지로 갖는다. 모른 체하며 넘어갈 수도 있고, 원래 그런 거라며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오히려 부당한 권력의 작용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선택지까지 고려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불쾌한 사실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은 그 표현이 낯설게 느껴질 뿐, 사실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다른 일반적인 능력들, 예컨대 신체 능력, 지적 능력과 마찬가지로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이받기 직전에 정신을 차리지 않는가.
사건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연이어 발생했다. 첫 번째 사건은 훈련소 3주 차 즈음이었다. 총 3개 호실로 나누어진 1소대 인원 전원은 3호실로 모이라는 방송이 있었다. 정원을 초과한 생활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빡빡머리 청년들 사이로 조교가 걸어 들어왔다. 조교는 물었다.
“자, 조용히 하고 집중한다.”
“여기 중에 부모님이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 CEO가 있다 하면 손든다.”
주춤하더니 몇 명이 손을 든다. 누구는 어느 시의 부시장 아들이고, 누구는 어느 공기업 사장 아들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계급사회인 줄로만 알았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웬 말인가. 사회적 지위의 상방을 찾는 이 낯 뜨거운 ‘조사’는 공개된 공간에서 행해졌다. 이걸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늘 당당했던 조교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몇 달 일찍 입대한 이 청년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두 번째 사건은 자대에 가기 전 잠깐 머물렀던 상급부대에서 벌어졌다. 여기서는 부사관급 간부가 직접 면담을 실시했고, 면담이 있기 전 나는 서면으로 몇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번에는 표정을 알 수 없는 활자들이 부끄러운 역할을 맡았다. ‘부모님의 상세 직업, 거주 중인 집의 월세/전세/자가 여부, 집의 평수, 학창 시절 왕따 경험’을 묻는 공란이 있었다. 자칫 사회적 지위의 하방이 드러날 수 있는 물음들이었다. 이것들 역시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상방은 공개적으로, 하방은 개별적으로 조사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기록된 정보는 어떻게 취급되는 것일까. 이런 정보들이 앞으로의 내 군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아니, 이른바 병력을 관리하겠다는 목적으로 이 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 지휘부는 이 정보가 내 군생활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치리라 여기는 것일까. 만약 부모님 두 분이 일반적인 직장에 종사하시지 않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학창 시절 왕따 경험이 있는 ‘정상’적인 전입 신병은 담당 부사관에게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해야 하는 것인가. 수치심을 이겨내고 나면, 그러고 나면 주의가 필요한 장병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수 있는 것일까.
조사는 전짓불 같았다. 이청준은 소설 『소문의 벽』에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 비추’는 상황이 주는 공포를 묘사한 바 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나의 진술만을 하고 있는 것’이 주는 무력함과 공포는 상당하다. 이것은 아마 이청준이 경험해야 했던 '불쾌한 사실'일 것이다.
어디에 기록되어, 누가 열람할 수 있고, 어떻게 사용되며, 언제 폐기되는지 알 수 없는 민감한 정보의 수집은 이제 막 군인이 된 민간인인 내가 '군인이 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부사관은 내가 작성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의견을 적었던 것일까. 그는 단지 조교와 같은 수동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이 과정에 적극 가담하는 사람인가.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없었다.
이 경험은 블레어의 '불쾌한 사실' 개념에 충분히 부합하는가. 블라인드 채용이 유행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비추어본다면, 이것이 불공정이든 권력의 남용이든 중요한 가치의 위반인 점은 분명해 보인다. 블레어가 경험했던 20세기 식민지 경찰과 21세기 대한민국 군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군대에서의 경험 때문에 권위에 대한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청년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권위와 복종이 군대의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는 권위의 형태는 어떤 모습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