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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Nov 25. 2020

#10. 서울이랑 안맞아

 기대했던 홀로 출장길이었다. 단정하게 정장으로 갖춰 입고 구두는 아무래도 무리라 단화를 신었다. 아이 등교 준비를 내가 해 주고 싶어 토스트를 굽고 머리도 묶어 주었다. 이제 나가야 하는데 작은 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깼다. 평소같지 않은 공기를 느꼈나보다. 보듬어 주고 나오느라 정말 늦어 버렸다. 아니 그 정도 늦은 줄은 몰랐다.

 제주에 온 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출근시간이다. 9시 5분 비행기니까 나는 이 출근 시간에 제주 시내 방향으로 가야한다. 공항 도착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라디오 디제이의 다정한 말투도 성가시게 들려 꺼 버렸다. 신호에 걸린 사이 다음 비행기를 검색해 봤지만 너무 늦게 생겼다. 무조건 이걸 타야한다.

 공항 도착 후 주차하고 보딩하는 최적의 루트를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다. 리마인드를 세번쯤 했을 때 공항 출발층에 올랐고 멈춤없이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하필 비가 오는 날이라 주차타워에 차가 가득이다. 2층, 3층, 4층까지 올라가 엘리베이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주차를 하고 뛰었다. 우산을 펴고 접는 시간도 아껴 계속 달렸다. 생체인식 등록을 미리 해둔 덕에 탑승수속도 빠르게 통과. 마지막 탑승손님을 찾는 안내 방송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서야 안도감이 들어 뜀박질을 멈추었다.


 나는 커리어 우먼. 낮에는 아이들과 지지고 볶다가 밤에는 머리를 질끈 묶고 밥 먹던 식탁에 노트북을 펴고 일 하는 워킹맘이다. 오늘은 출장 가는 날. 무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바쁘게 올라가야 한다. 집에서는 여유롭게 아이들을 챙기다 현관 문을 닫자마자 급하게 운전하고 여기까지 뛰어 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면 만족스러운 연출이다. 롱 가디건을 펄럭 거리며 뛰는 건 좀 멋있었겠다.

 아슬아슬하게 보딩을 해놓고 이런 꼴 같지않은 상상을 하고 앉았다.


 내가 극한 스트레스 상황에 몰릴 때 마인드컨트롤 하는 방법이다. 드라마 연출이자 주인공이아고 상상하는 것. 이미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고 그 결말은 해피엔딩이며 나는 단지 이 장면에서 곤란에 빠진 연기를 하면 된다. 비밀스런 배우가 진짜처럼 연기한 씬이 끝나면 스트레스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평정심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끔찍한 상황은 곧 끝날 것이고, 나는 다 괜찮아진다고 말이다.

 휴. 시나리오 대로 나는 무사히 김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센 날이었다. 내가 탄 것이 비행기인지 연인지 모르겠다. 끝에는 바이킹을 탄 줄 알았다. 하. 이건 준비된 스토리가 아니다. 몸을 웅크리고 싶은데 정장바지가 너무 불편하다. 어찌 랜딩을 했는지 모르겠고 손발이 저려서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속을 비워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두 번 멋있었다가는-


 일이 제대로 됐을리가 없다. 보고 싶었던 서울 친구들이나 실컷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풀려 배가 고파졌다. 아이들 두고 가볍게 왔으니 조용한 식당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것이다. 아니면 맵고 뜨거운 탕요리도 좋겠다.


 "차에 비상등을 켜두셨는데요?"

 제주공항 주차장에서 내 차 비상등이 깜박이고 있다고 전화가 왔다. 너무 고맙지만 지나치게 친절하신 분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내 자유시간이 이렇게 심난하진 않았을텐데.

 뜨거운 국밥을 먹는 동안에도 제일 보고팠던 사람과 진한 커피를 마실 때도 비상등은 내 머리 속에서 계속 깜박였다. 젠장.


 지난 번 출장 때는 두통으로 한나절을 보내다 모처럼 남편과 단 둘이 식사하는 동안에도 힘이 들었다. 그대로 다음 날까지 잠만 퍼 자고 돌아왔단 말이다.

 

 이쯤되니 사고뭉치가 진짜 나고, 우아한 척을 연기하는 쪽이 페르소나인가 싶다. 어느 쪽이 배우이면 어떤가. 어차피 혼자만의 비밀놀이인 것을. 내가 연출하는 내 드라마는 항상 나 좋은 스토리로 흘러간다. 순간순간 위기가 와도 결말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쓰면 정말 그렇게 된다. 특히 힘들 때 나를 전지적 카메라 시점으로 멀리 줌아웃해 바라보면 별 것 아닌 일이 되어 오래지않아 회복할 수 있다. 슬픔에 깊이 빠지지않고 쳐지는 기분을 오래 두지않는 나만의 노하우랄까.


 내일도 오랜만에 늦잠이나 실컷 자고 가지 뭐.

 하, 깜박이는 도무지 신경이 안꺼진다.

 

 너는 서울이랑 안맞나보다.

 그냥 제주에 살아라.

 남편이 나 제주에 살어란다.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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