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때그대 Nov 18. 2020

#9. 천천히 빨리 커라.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비빔라면을 끓였다. 평소답지않게 소스를 남김없이 넣었다. 더 매워도 좋았을 뻔 했다. 저녁으로 맑은 콩나물국을 끓여낼 때 부터 매운 고추를 서너 쪽 넣은 칼칼한 맛이 당겼다.

 호로록 호로록. 두 개 끓일 걸 후회가 된다.

 하. 너는 왜 그래 정말. 이 말 만큼은 하지 말 걸 후회가 된다.


 잠독립을 못하고 여전히 엄마 팔꿈치를 만지작 거리는 아홉살 딸아이에게 불편한 티를 내고 나온 밤이다. 잠이 든 후에 거실로 출근하는 엄마인 것을 알면서 선잠이 깨어 엄마가 옆에 없으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아이. 멀리도 아니고 거실인데 그걸 이해 못 하는 아이를 나는 이해 못 하겠다.

 임신 기간을 합치면 십 년이다. 십 년 동안 아이와 떨어져 잠을 잔 날이 열흘이 안된다고 확신한다. 유난히 애착이 강해 이만큼 키우는 동안 나는 피곤했어도 곧 지나갈 시간이라 생각하며 꼬옥 안고 살았다. 그게 십 년이 되어도 모자랄 줄이야. 더 많이 안아주어야겠다. 마음을 잘 잡고 있다가도 평소와 다름 없는 아이의 모습인데 화르륵 화가 오르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잠이 부족하고 유아 식단에 질린 탓이라고 핑계를 대어본다. 오직 커피로 멘탈을 잡고 있기 때문에 내 인성은 이렇게 금방 바닥이 드러난다. 그걸 또 아이에게 들킨 것 같아서 스스로 화가 났다. 톤을 바꿔 잘자라고 인사했다. 굿나잇 키스는 어쩐지 억지같아서 하지 않았다.

 아이가 잠 들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 아이 몰래 숨을 몰아 쉬었다. 스읍 후우. 모르게 할 수 없을만큼 깊고 깊은 숨소리가 난다. 그래도 모른 척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슬쩍 몸을 돌리더니 작은 손으로 내 어깨를 쓸어주었다. 미안해. 그리고 이해해. 그럴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누가 누구를 위로 하는 거야. 후회와 미안함에 부끄러움까지 몰려와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와 버렸다.


 나의 아홉살 키워드는 '스스로'였다고 기억한다. 엄마는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셨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 늦지않게 학교에 가고 돌아와서 간식 챙겨먹는 것 까지 스스로 해야했다. 엄마는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되면 재취업을 하겠다고 계획한 것이었다지만 나에게는 갑자기였다. 아침에 혼자 머리를 묶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손이 작고 힘도 없어서 하나로 묶어 올리느라 팔이 덜덜 떨렸다. 오죽하면 한 줌에 못잡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을까. 대문 열쇠는 항상 목에 걸고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자렌지에 2분 데워 먹어라' 같은 엄마의 손글씨 메모대로 간식을 먹고, 저녁까지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덤덤하게 글이 써지는 것을 보니 아홉살의 나는 꽤 의연하게 해냈었나보다. 그러면서도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필시 어린 내가 긴장하고 있었을 때다. 비록 준비없이 시작됐지만 나는 아홉살에 자립심을 배워야 했다. 내가 생각하는 아홉살은 그런 나이다. 실은 여덟살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소위 빠른 생일이라 한 해 일찍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딸아이보다 더 어린 나에게 엄마가 너무 했다.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고 스스로 할 일을 잘 하던 어린이는 커서 성실하고 믿음직한 어른이 된다. 그리고 나보다 더 의젓하고 부지런한 딸을 낳았다. 혼자 알람을 맞추고 아침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마치고 앉아 책을 보는 작은 사람. 이 아이를 내가 낳았다니. 내가 딸 아이 육아에 힘들어 엄마에게 하소연하면 너보다 백 배는 나은 아이다. 함부로 대하지 마라. 하신다.


 아이의 시간을 존중해주려고 제주에 오지 않았던가. 학원 갈 시간이니 놀이를 곧 끝내라 아이를 재촉하고 싶지 않은 것이 결심의 시작이었다. 딸 아이는 충분히 놀면 다른 재미거리를 찾다가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그림을 그리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완성된 그림을 들고 달려와 나에게 바라는 건 오직 인정과 사랑뿐인 아이. 놀이가 그렇듯 단짝친구를 사귀고, 공부를 하고, 마음을 키우는 모든 순간은 아이가 정하는 속도에 맡겨야 한다.

 잠독립은 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어서 아이의 속도를 마냥 기다리기가 솔직히 힘에 부친다. 내가 아직도 새벽수유를 하고 있나 싶을 정도다. 따로 자겠다고 해 방을 원하는대로 꾸며줬더니 며칠 만에 엄마 이불 속으로 도로 들어온 게 몇 번째인지. 내일은 아홉살 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 아이가 준비하는 시간은 언제인지,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나도 너랑 같이 자는 게 정말 좋지만 힘들 때가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살겠다. 어제 밤에는 엄마가 짜증내서 미안하다. 어디라도 살이 닿아 있지 않으면 네가 뾰족해지는 통에 새벽잠을 깨는 일이 많아 피곤하다고 말이다.

 타임라인을 정하기 전에 아이 스스로 준비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내 컨디션을 잘 조절해야지. 내가 평화로워야 아이에게 너그러우니까. 때때로 나만을 위한 식단을 차리고 일이 없을 땐 일찍 자고 커피는 줄이고.


 여기까지 쓰고 방을 들여다 봤다. 딸 아이는 아예 내 베게에 코를 묻고 모로 누웠고 작은 아이는 침대 가로로 누워 몸을 펼쳐 잠들어 있다. 저기 애매한 가운데가 내 잠자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8. 계절만 느린 게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