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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Nov 12. 2020

#8. 계절만 느린 게 아니다.

 서울의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제주는 아직 아침에도 10도를 웃도는 포근함이 있어 실감이 안난다. 아이는 얇은 면티에 점퍼만 입고 학교에 갔고 그마저도 점심놀이 시간에는 벗고 뛰어 놀았단다. 그 날은 입동이었다.


 한여름에 제주로 이사오면서부터 눈 덮힌 한라산을 상상했다. 베란다 뷰로 보이는 저 한라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참 좋겠다. 멀리서 바라보면 더 아름답겠다. 드디어 올 해가 끝났구나 싶어 후련하겠다. 나는 내가 여태 겨울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아직은 푸른 한라산을 보면서 나는 겨울이 아니라 끝을 기다린다는 걸 깨달았다.


 새해가 되면 희망적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힘을 내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새해를 맞이한지 몇 년 되었는데 좋은 점이 있다. 이루어 낸 것이 반드시 하나 이상 있다는 것. 올 해로 말하자면 제주생활을 기특하게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크겠다. 한 달에 한 번 제철 식재료로 요리 하는 것도 재미를 붙이고 있다. 나는 사실 게으르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도 아닌지라 무엇 하나가 없을리 없다.

 영어공부를 하고, 책을 한 달에 몇 권을 읽고, 커피는 하루 두 잔만 마시고, 이직을 하고. 살면서 크고 작은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계획대로 되는 게 없더라. 큰 목표를 세우면 어렵다길래 역까지 걸어다니기 같은 작은 실천꺼리도 결심해 보았지만 실패였다. 삼일마다 결심하라는 충고도 약발이 없었다. 지켜야한다는 압박에 좋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지고 흐지부지 되었다. 책 읽는 것도 숙제같고 매일 마시던 그 커피도 싱겁게 느껴져서 두 잔으로는 부족했다. 계획과 실천 사이에 잡생각이 너무 많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루저가 되어 어느 날 멍청하게 새해를 맞이한 것이다. 계획없이 살겠다고 계획한 적은 없다.


 내가 지금 좋은 것을 해야겠다. 먼저 계획하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하자. 내가 기쁜 방향으로 가다보면 상황을 정리할 일이 생기고 그게 곧 계획이다. 내가 나를 닥달하지 말아야 한다. 여태 스스로 볶아대어 성실한 이미지를 얻었을지 몰라도 즐겁지 않은 순간이 절반이지않나. 남들에게 잘 보이는 내가 아니라 내가 나를 기쁘게 해주자. 이것이 계획인 셈이다.


 뒷심이 없고 체력도 달리는 나는 그래서 가을겨울이 좋다. 휴 다 지나갔구나. 몸을 웅크리고 둔하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계절이 왔다. 여름에도 차가운 수영장에 풍덩 뛰어드는 게 몸서리치도록 싫고 더운 물로 샤워를 하는 나에게 여름은 너무 길다.

 가을. 짧게 지나가서 더 아쉬운 계절이었다. 패션쇼 무대 뒤 모델들처럼 재빨리 다음 의상으로 갈아입고 한바퀴 돌아주면 끝나는 계절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서울에서의 가을은 그랬다.

 제주 가을은 매일 보는 초록나무와 검은 돌담 색이 조금씩 짙어지는 것으로 알아챈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색 온도가 높아져 포근함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서울에서 흔하게  보던 은행나무가 없어서인지 계절감이 무디다. 가을이 느리게 간다. 내 감정 기복이 크지않고 그럭저럭 잔잔하게 흐른다. 조바심으로 계절을 세지 않아도 된다.


 계절이 느리게 가는 곳에 산다.

 덕분에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중이다. 바쁘게 가버리는 가을에 나는 망쳐버린 한 해를 북 찢어 구기고 겨울동안 반성하며 새 노트를 준비하곤 했다. 막상 진짜 망친 일도 없고 건강한 몸뚱이로 소소하게 즐거운 일을 쌓아놓고  말이다.

 가을을 천천히 보내면서 잘했다 잘했다 말하겠다. 겨울이 오면 팔을 접어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는 모양으로 따뜻하게 품어주겠다.

 사는 곳의 평균기온이 높을 뿐인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 달라지나.

 계절을 선택하여 세계로 여행이 하고 싶다. 여름에는 쾌적한 도시로 어디든. 겨울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열흘. 봄 가을에는 여기 제주가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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