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만화방 주인아줌마는 예상대로 불륜남과 낄낄대며 전화 중이었다.
우리는 그 책을 훔치기만 하면 된다. 여기쯤에 있었는데….
“야! 어떻게 해. 없어, 그것만 없어. 4권만 없다고!”
당황한 여운이가 목소리 톤을 낮췄다.
“뭐? 무슨 얘기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이다. ‘드림, 드림, 드림’이 꽂혀 있는 곳은 오른쪽 코너에 있는 책장의 두 번째 칸, 그런데 리얼! 4권만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진짜 뭐야. 어떡하지? 애들에게 가 보자”
우리는 정수기 앞에서 하이틴 로맨스를 읽고 있는 여름이에게 갔다.
“여름아, 큰일 났어. 그것만 없어. 그것만!”
누가 들을세라 여운이는 숨죽여 이야기했다.
애타는 우리의 갈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이는 갑자기 배시시 웃으며 배를 통통 튕긴다.
“뭐… 뭐 하는 거야?”
멍한 얼굴을 한 우리를 보며 다시 한번 배를 통통! 여름이의 배가 살짝 불룩했다.
아! 역시, 여름이는 한 수 위다. 그래서 여름이와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지. 우리는 FBI 비밀 요원처럼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슬쩍 빠져야지.
“학생들! 오늘은 아무것도 안 빌려가?”
“아! 네. 오늘 수… 숙제가 많아서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또 와”
길 건너 미미 문방구까지 우리는 죽어라 뛰었다. 행여나 “학생들 거기 서!” 소리 지르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두려워하며 쌉싸래한 바람을 세차게 갈랐다. 두려움 때문인지 달리기 때문인지 맥박이 요동쳤다.
“아! 겁나서 다시 갖다 주고 싶었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헉헉대는 다빈이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벌게진 얼굴로 웃었다.
“여름아, 넌 정말 간도 크다. 안 무서웠어? 언제 훔쳤어? 진짜 빠르다.”
숨 고르던 여운이도 한마디 보탰다.
“어차피 훔쳐야 하는 거. 재빨리 해야지. 너네처럼 미적 거리다가는 걸리기밖에 더하겠어? 수상해 보일 거고. 가자마자 벌처럼 날아서 우아하게 쌔볐지. 하하하!”
어깨가 한껏 올라간 여름이의 표정이 득의에 차 있다.
“이거 어쩌냐 미안해서. 나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하게 되고.”
혹시라도 걸렸다면 경찰서 행이었을까? 명백한 도둑질이다. 나는 아이들을 도둑으로 만든 거고.
“미안할 거 없어. 그 발광머리앤이 재수 없는 거지. 아니 4권이 없으면 4권만 물어주면 되는 거 아냐? 왜 1권부터 12권까지 다 물어내라고 하는 건데. 진짜 지랄발광녀. 재수 없어. 발광머리앤 만화방에 다시는 가나 봐라.”
여름이는 죄 없는 돌멩이를 사납게 찼다. 돌멩이는 억울한지 토라진 채 쌩 날아 풀 숲에 몸을 숨겼다.
“담탱이도 진짜 재수 없지 않냐. 아니 머리 갈겼으면 됐지. 왜 만화책을 가져가는데? 아마 교무실에서 지들끼리 돌려보며 낄낄 댈 거야. 분명하다니까.”
다빈이는 우리 중에서 담임을 제일 싫어한다. 우리도 담임이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빈이처럼 지치지도 않고 매일 욕해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여름이 엄마가 옆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 나는 절대 선생님들 욕은 안 하기로 결심했다.
지난주 재수 옴 붙은 그날, 만화책을 보다가 담임에게 걸렸다. 담임은 출석부로 내 머리를 후려친 뒤 만화책을 가져가 버렸고, 그렇게 만화책을 빼앗겼다.
만화방 이름은 슬기 만화방이지만 지랄 맞은 성격 탓에 발광머리앤으로 불리는 아줌마는 4권이 없으면 곤란하다면서 4권을 가져오던지 아니면 1권부터 12권까지 다 물어내라는 어처구니없는 계산법을 들이댔다. 역시 지랄발광이다.
아니 사기 칠 사람이 따로 있지.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어처구니없었지만 찍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네 생각대로 교무실에 가서 그 만화책 훔치다 걸렸어 봐. 숙직 선생님이 있었을 텐데. 우린 완전 끝이라고. 아줌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단골 만화방에서 훔치는 게 혹시 걸리더라도 뒤가 깨끗하지.”
밤에 교무실에 몰래 가서 훔치자고 한 다빈이의 제안은 깔끔하게 묵살됐다.
우리는 결국 단골 만화방 중의 하나인 최고 만화방에서 4권을 훔쳐서 발광머리앤네 만화방에 갖다 주는 걸로 합의를 봤다.
“그래 여름이 말이 맞아. 교무실을 습격하지 않은 건 잘한 것 같아. 아줌마한테는 미안하니까 많이 팔아주면 되지 뭐. 우리 이번 주 주말에 만화방 가서 종일 만화만 읽자. 라면도 먹고. 문어발도 사 먹으면 되잖아.”
“좋아. 나는 시간 돼. 올 때 쿠션 가져와. 담요도. 계속 있으면 은근 추우니까.”
“그래 오랜만에 뭉치자고. 정은아, 너는? 바빠?”
“... 아니, 나도 갈게. 미안하다... 그냥... 고마워.”
간신히 입을 떼었는데 쪽팔리게 코가 빨개진다. 갑자기 뜨거운 불 같은 게 맹렬히 내 맘 속을 헤집고 다니다 얼굴마저 뜨거워진다. '꺽꺽'대며 울고 싶은 이 기분을 설명하기 복잡하다.
“에이! 왜 이래. 촌스럽게. 돈으로 보답해라. 그날 컵라면은 네가 다 쏘는 거다. 알겠지?”
여름이 다운 계산법이다.
“당연하지. 사이다도 먹어. 문어발도 먹고. 나가서 피자 먹어도 돼. 너희들이 내 재력을 두려워할 만큼 화끈하게 쏴주지.” 아이들이 내 마음을 알아차릴까 싶어 한 톤 높은 소리를 지어냈다.
얘들아! 너희도 속으로는 겁 많이 났지? 정말 고맙다. 너희들이 힘들 때는 내가 앞장설 거야. 꼬옥.
“야! 야! 너 괜찮은 거야?”
퉁퉁 부은 눈을 돌리니 아까 옥상에서 맞고 있을 때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아이가 쭈뼛대고 있었다.
“... 괜찮아?”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아니, 나는... 은정이가 네... 네게 그...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울 것 같은 얼굴에 말 더듬는 꼴이 진심인 것 같다.
“뭐야, 너도 같은 패거리잖아.”
“아냐, 아냐. 나는 은정이가 우리 반에 와서 너를 데려가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따라 올라간 것뿐이야.”
전부 봤구나. 처음부터…. 그래도 나도 몇 번 어퍼컷을 날려서 다행이다. 제대로 맞지는 않았지만.
“너 우리 반이지?”
“어. 나는 박 여운이라고 해.”
핀컬 파마를 한 건지 원래 곱슬기가 있는 건지 살짝 구불한 웨이브에 착한 눈을 하고 있다. 걱정돼서 올라온 거구나.
“반 전체가 나를 왕따 시키고 있는 거 아니었어? 너 이렇게 나랑 얘기해도 되는 거야?”
울컥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술술 나왔다.
“아… 그게… 나는… 특별히 네가 싫거나 하지 않은데… 소라하고 은영이가 너랑 얘기하지 말라고….”
그렇지. 그 둘일 줄 알았다. 나이를 생각해라 이것들아, 유치하기는….
“애들이 다 너 건방지다고… 전학생 주제에 너무 나댄다고….”
핀컬 파마는 하던 얘기를 이었다.
나댄다고? 사실 얘들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전학 온 일주일 동안은 반에서 상위 그룹에 속하는 몇 명이 내 자리에 모여서 친절히 학교 소개도 해 주고, 밥도 같이 먹었다.
쉬는 시간마다 애들이 몰려와 전 학교에 대한 얘기도 묻고 고향 이야기도 같이 하며 깔깔 웃었다.
“그럼 너도 말도 걸지 말고 나를 무시하고 있어야지,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러냐.”
“... 미안해. 많이... 아팠지? 사실 은정이도 알고 보면 착한 애야. 초등학교 나랑 같이 다녔는데 그때는 안 그랬어.”
응? 가죽 미니스커트에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이 착한 애라는 거지?
“누가 걔 변명해달래? 나보고 재수 없게 굴지 말라더라. 그 알고 보면 착한 애가…. 난 걔랑 얘기해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거든? 근데 왜 난리야.”
손 까딱이며 따라오라고 할 때부터 '뭔 일이 있구나' 생각은 했지만, 얘기해 본 적도 없는 일진한테 얻어터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라 곱씹을수록 어이없고 분했다.
“아마 소라가 은정이한테 네 얘기했을 거야. 둘이 꽤 친하거든. 미안해.”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처럼 주눅 들어 이야기하는 핀컬 파마 눈에 눈물이 고인다. 뭐야 얘? 자기가 왜 미안해? 천사 코스프레?
“됐고, 돈 좀 있냐? 난 배고픈데.”
“어? 어! 있어. 있어. 그럼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까? 학교 앞 신성 분식이 제일 맛있어.”
“난 돈 없어. 얻어맞아서 힘도 없고. 오늘 네가 쏘는 거다.”
“알았어. 가자. 거기 아줌마는 떡볶이 이인분 시키면 만두도 두 개 서비스로 넣어 줘.”
얼마 만에 먹어 보는 떡볶이일까. 반 애들의 왕따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를 악 물었다. 너희들이 암만 그래도 난 지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멀찍이 떨어져 같은 교복이 보이지 않게 되면 학교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한 번 떨군 눈물은 걷잡기 힘들게 쏟아졌다. 길 가던 아줌마가 놀래 달려온 적도 여러 번이다.
"야! 저 차 좀 봐! 저거 영화에나 나오는 자동차 아니야?"
핀컬 파마가 2차선 쪽에 정차해 있는 람보르기니에 광분하고 있는 사이 주책맞게 흐르려 하는 눈물을 재빨리 훔쳐냈다.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눈물이었다.
“어! 여운! 오래간만! 그런데 저 애…”
흰 피부에 짙은 눈썹을 한 긴 머리가 알은체를 했다. 나는 못 본 척 자리에 앉았다.
“응 너도 알지? 문정은이라고 우리 반 전학생이야.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하기로 했어.”
뭐? 내가 언제? 난 그냥 떡볶이나 얻어먹으려 온 건데.
“아! 그 전학생? 겁나 싸가지 없다며?”
사람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해대는 너야말로 남 싸가지 운운할 때가 아닌데. 호탕한 목소리에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커트 머리는 왠지 모를 자신감을 풍기고 있었다.
“내… 내가…어… 언제… 그랬어? 그… 그냥 저… 전학… 생이라고만 했지.”
말을 막 더듬는 걸 보니 천사는 아니었군. 그래 그 정도야 뭐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난 이 여름이야. 너 유명하더라. 나 3반인데 네 소문이 쫘악 났었어. 하도 2반 애들이 재수 없다길래 나도 너 구경하러 갔었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평범해서 실망했지.”
“재수 없고 평범해서 미안하다. 나 문정은이야.”
건너편에 앉아있던 긴 머리가 커트 머리를 바라보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여름아, 그런 얘기까지 다 할 필요 없잖아. 미안해. 대신 사과할게. 나는 정 다빈이야. 우리 셋은 초등학교 동창이고 집도 다 가까워. 나도 너랑 같은 반이야.”
“그렇구나. 미안, 누가 누군지 아직 얼굴을 다 몰라서.”
“괜찮아.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런데 여운이랑 너랑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거야. 너희가 말하는 것도 본 적이 없는데.”
“응. 재수 없다는 말만 했지? 나도 내가 여기 오게 될 줄 몰랐어.”
웃으며 말하는 내 팔을 잡으며 핀컬 파마가 다급히 말했다.
“미안해 정은아. 그때는 나도 조금 네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었어. 정말 미안! … 애들아! 실은 오늘 은정이랑 패거리들이 정은이를 옥상으로 데리고 갔었어.”
핀컬 파마는 나머지에게 얼굴을 돌리며 눈을 반짝댔다.
“뭐? 그 깡패들이? 그래서? 어떻게 됐어? 별일 없었어?”
두 아이는 바짝 다가와 자세를 고쳤다.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오늘 일 뿐만이 아니라 변태 영어 선생이 실은 고자라는 얘기, 노처녀 국어와 임신한 부인이 있는 대머리 수학의 로맨스, 경건한 성경책 속에 몰래 쪽지를 넣어 고백한 교회 오빠….
시계를 보니 벌써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주위는 깜깜해졌다. 아쉬웠다. 많이 아쉬웠다.
“이번 수학 점수를 잘 맞아야 하는데…. 우리 담임 정말 원서 안 써줄지 몰라.”
여운는 금세라도 울 듯하다.
“여운아! 항상 열심히 하잖아. 올해는 좀 더 좋은 점수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다빈이는 여운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여운이 어려서부터 꿈이 의사였거든. 아버지도 오빠도 의사고. 여운이는 할머니가 되면 가난한 나라에 가서 거기 아이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고 싶대. 그래서 의사가 꼭 되고 싶다는 거고.”
아는 게 많지 않은 나를 위해 다빈이는 여운이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역시 심성 고운 여운이답다.
“아니지, 수학은 금방 안 올라.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차라리 수학할 시간에 다른 과목을 한 번 더 보는 건 어때?”
가뜩이나 수심 가득한 여운이 얼굴이 더 어두워진다. 여름이는 쿨하고 똑똑하고 용기 있어서 좋은데 이게 문제다. 여름이는 여름이 방식이 있고 여운이는 여운이 방식이 있는 거다..
“그런데 여운아. 수학 점수 딸리면 의대 가기는 힘든 거 아냐?”
어휴! 진짜 저럴 땐 한 대 치고 싶다. 그 사실을 누가 모를까. 여운이 가슴에 말뚝을 박아라 박아. 가뜩이나 힘든 애를….
“어, 그렇지. 나도 잘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잘 안 되네.”
“그나저나 걱정이다. 우리 담임 원서 쓸 때 까다롭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다빈이가 한숨을 쉬며 여운이를 바라봤다. 여운이는 짐짓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내 노력만이 답이겠지.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거지.”
여운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여운이가 다빈이 뒤에 앉는다면 수학 랭킹 전국 5% 안에 드는 다빈이의 시험지라도 커닝할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앞이라…. 아쉽다. 아쉬워.”
진짜 저 같은 말만 하고 있네. 어휴, 이 여름! 진짜 얄미워.
“야! 앞이고 뒤고 여운이가 너랑 같냐? 여운이가 커닝 같은 걸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울상인 여운이 얼굴을 보니 여름이가 얄미워져 톡 쏘았다. 저런 걸 아이디어라고 내놓다니….
가만! …아! 그렇지!
“야! 정 다빈! 너 여운이 수학 답안 알려줄 수 있어?”
“그거야 할 수 있지. 대학 원서를 쓰냐 마냐의 문제잖아. 그렇지만 네 말대로 여운이는 그런 거 못 해.”
“아냐, 아냐. 그건 됐고, 여운아! 너 다빈이한테 도움받을 생각 있어?”
“어? 나는… 원서... 걱정은 되는데… 담임이… 다빈이가… 아니 그렇지만 커닝은 무서워.”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여운이가 횡설수설한다.
“알아, 여운아! 그래도 점수가 좋게 나오지 않으면 원서를 못 쓸 테니 수학 점수가 오를 때까지는…. 물론 열심히 수학 공부하는 건 기본이지만 당분간 시험 때 다빈이 도움을 받아.”
나도 내 비상함에 놀랐다.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다니. 마음 약한 여운이도 이거라면 걱정 없다. 들킬 리 없어.
“그러니까 여운이는…”
“다빈아, 네가 뭐 걱정하는지 알아. 여운이도.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자! 모여봐! 이건 우리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거라고.”
열띤 나의 설명에 모두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끝까지 망설였지만 여운이도 다빈이의 도움을 아니 커닝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모두 눈 감고, 손 머리 위에 올려. 시험지 나눠 준다. 야! 주걱턱! 눈 돌리지 마.”
하필이면 피터팬 물리가 들어오다니. 1학년 수학이지만 '걸리면 피 터지도록 팬다'는 훈훈한 피터팬 스승의 가르침을 전교생은 다 알고 있었다.
22번 문제를 풀 즈음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정은이와 다빈이를 슬쩍 봤다.
“야! 거기! 뭐 하는 거야. 고개를 왜 쳐들어. 커닝이라도 할 셈인가.”
역시 만만치 않군. 걸리지 말고 잘 끝내야 하는데. 저 인간은 가만히 안 있고 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자! 답안지 걷는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부정행위로 간주한다. 맨 뒷사람 답안지 회수해.”
달려가다시피 여운이에게로 갔다. 나를 보는 여운이 얼굴에 웃음이 퍼진다. 성공했구나! 다빈이도 같은 얼굴이다. 역시 성공했어. 성공이야. 여운이 손을 한 번 잡고 다빈이 어깨를 두드린 후 내 자리로 돌아와 지리 교과서를 폈다.
“와! 이건 말이지 롯데월드 자이로드롭 있잖아. 그거 떨어지기 직전 느낌, 알지? 알지? 그거야, 그거! 왜 피터팬이 들어오냐고. 음악이 들어왔으면 좀 좋아?”
떡볶이를 포크에 꽂은 채 다빈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흰 블라우스 앞자락에 떡볶이 국물이 틘 것도 모르는 눈치다.
“진짜? 피터팬이었어? 와!! 소름!! 그래서? 그래서?”
당시 상황을 묻는 여름이 얼굴이 긴박해 보인다.
“그래서는 뭐. 우리가 예행연습한 대로 모두 완벽하게 성공시켰지. 정은이 진짜 대단하지 않냐? 참, 여름아! 네 날카로운 지적도 딱 들어맞았어. 예행연습해 본 것도 어찌나 다행이던지. 이번에도 백 점 나올 것 같아. 내가 백 점이면 여운이도 백점인 거지. 하하하!”
다들 왁자한 가운데 조용한 여운이가 신경 쓰여 물었다.
“여운아! 왜 그래? 잘 된 거 같은데?”
“응. 정은아 고마워. 걸리지도 않았고, 문제없었어.”
정은이는 먹은 게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
“나 너네 반으로 전학 가면 안 되냐? 부럽다, 부러워. 여운이는 다빈이 앞, 나는 다빈이 뒤에 앉아서….” 여름이가 얘기를 잠깐 끊고 오뎅 국물을 홀짝 마셨다.
“발을 뻗어서 서로 맞대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 아무리 샘들이 노련하다 해도 우리가 발로 커닝할 줄 어떻게 알겠냐고. 안 보이는데. 시험 종료 15분 전에 1번부터 4번까지 5번부터 8번까지…4개씩 발로 쳐서 알려 주는 것! 완전 판타스틱! 깔끔해! 부라보!”
같은 반도 아니면서 여름이는 자기도 직접 경험한 양 떠벌리며 흥분했다.
“예행연습할 때 3번 하고 4번 답은 치는 횟수가 많아서 잘못 전달될 수 있으니까 4번은 꾸욱 누르기로 한 거, 그거 내 아이디어잖아. 이 몸, 정말 천재 아니냐? 여운아 예행연습대로 잘했어?”
“…”
“여운아, 뭐야! 왜 그래!”
역시 뭔가 문제가 있었나 보다.
“얘들아!”
“그래, 말해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는다니까.”
다빈이는 양 미간에 주름을 그리며 힘주어 말했다.
“우선 다빈아 정말 고마워. 너도 항상 힘들게 공부하면서 나를 위해 그렇게 노력해 주고. 너희들도 너무 고맙다.”
“뭐야. 국회의원 선거야 뭐야.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데?”
참을성이 없는 여름이가 훅 들어왔다.
“나 실은 다빈이가 알려준 거 안 썼어.”
“뭐라고? 정말이야?”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여운이를 바라봤다.
“문제를 풀어보니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지난번보다는 풀만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대학 원서는 무사히 써야 하지만 그런 방법이 좀…. 너희들이 나를 위해 시험공부할 시간도 쪼개가며 예행연습까지 해주고 있는데 차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여운이는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떨궜다.
“미안하기는 여운아. 우리가 생각이 짧았어. 네 생각도 잘 모르고…. 나쁜 일로 너를 도와주려 하다니…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네.”
여름이 목소리 톤이 2옥타브는 낮아졌다.
“야! 이 여름! 판타스틱이라며. 다빈이 뒤로 전학 오고 싶으시다며!”
좀 전만 해도 방방 뛰다가 다시 금방 풀이 죽은 여름이가 귀여워서 살살 약을 올려줬다.
여름이는 살기 품은 얼굴로 목을 조르려 했다.
“그래도 얘들아.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든든해. 혹시 원서 못 쓴다고 해도 나는 후회 없어.”
“그래, 그래. 우리도 여운이가 마음 편한 게 좋지. 서로 억지로 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
다빈이가 분위기를 정리하며 나섰다.
“그럼 오늘 떡볶이는 여운이가 사는 거다. 괜찮지?”
여운이는 아직 대답 전인데 여름이는 벌써 메뉴를 훑고 있다.
“그래. 많이 먹어. 나도 너희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했어. 그냥 알려준 대로 커닝했다고 할까 하다가 서로 속이는 것은 친구가 아니잖아.”
“맞아, 맞아. 그래 여운아. 너도 오늘 네 지갑 속을 속이지 말고 진실하게 다 써라. 아줌마! 저희 주문받으세요.”
“하하하하”
모두 소리 높여 웃었다. 문 입구에 앉아 끄덕끄덕 졸던 아줌마는 화들짝 놀라 신발을 고쳐 신었다.
야채 듬뿍 들어간 떡볶이와 식어버린 오뎅 국물의 조화가 환상이다. 빛의 속도로 없어져 가는 떡볶이 옆에는 푸짐한 모둠 튀김이 대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