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음, 한 걸음 물러남
스피드를 미덕으로 돌진해 온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군중들은 이제 '천천히, 천천히'를 외치며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앞에선 어물쩍 눈 돌리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 철학에선 누누이 중용이 주는 편안함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이란 밋밋하기 짝이 없는 도태요, 뼈대 없는 상실감이요,
드러나지 않는 칩거의 색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잠자코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한 걸음 뒤에 서면 세상에 나는 보이지 않는 걸까.
손바닥만한 미니스커트 밑으로 나온 여자 친구의 죽이는 각선미, 우리의 부러움을 꽤나 사고 있는 동창 녀석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얘기 보따리가 풀렸다 하면 으레 덜 떨어진 그 녀석보다는 옆에서 고급 액세서리 역할을 하는 '끝내주는 여자 친구' 얘기에 침을 흘렸고, 결론은 항상 '언제 우리는 그렇게 섹시한 여자 친구가 생기나'로 마무리되곤 했다.
얼굴이 꽤나 곱고 하얗던 나의 그녀, 항상 말이 없고 겸손했다. 다소곳한 표정의 그녀는 나의 말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으며 '당신이야말로 나의 하늘'이라는 표정과 존경을 담은 눈빛으로 내 마음을 천국의 그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우리의 나이 차가 7년이라는 물리적 이유도 있었겠으나 그녀는 천상 여자였던 것이다.
반질대는 생머리에 하얀 피부, 산행을 하지 않고서야 결코 볼 수 없는 바지 입은 그녀 모습, 페미니즘 어쩌고 하는 여성 세력이 권력을 득해 가는 이 무서운 시대에 그녀는 기특하게도 항상 치마만을 고집했다. 이렇듯 완벽한 반쪽의 내면을 갖춘 그녀임에도 내겐 내색하지 못하는 불만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옷차림에 관한 아니, 정확하게는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치미에 관한 것이었다.
도대체가 속살을 보여주는 일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동창 녀석의 여자 친구 같은 그런 섹시한 미니 스커트가 아니라면 차라리 생머리 여학생들이 즐겨 입는 파스텔톤의 긴치마도 괜찮았으나 그녀의 치마는 변함이 없었다. 늘 종아리 중간... 얼마나 입어댔는지 하도 빨아 색깔조차 분명치 않은 몇 개의 치마들과 밋밋한 블라우스, 내 손으로 걷어 버리고 싶은 답답한 길이에서 나오는 촌스러움.
"편안하잖아요, 미니스커트는 너무 짧아 신경 쓰이고 긴치마는 움직이기 불편하거든요."
나는 그녀의 패션 감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어쩜 그녀는 안짱다리일 거라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불룩한 알이 배겨 맵시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 부분에 관한 희망은 애초에 접어버렸다. 그녀의 다리, 아니 슈퍼모델 뺨치는 각선미를 보고 화들짝 놀란 것은 몇 년 전 춘천에서다.
그녀는 안짱다리도 휜다리도 아닌 누구나 한번쯤 돌아볼 쭉 뻗은 각선미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국화빵이라 불리는 두 아들 녀석을 바라보며 지금 나는 생각한다. 미니스커트가 주는 아찔함도 긴치마의 청순함도 없었지만 그녀 말마따나 그 치마로 인해 난 편안하지 않았을까 하고... 격정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젊음의 열기를 그녀의 그 어정쩡한 치마가 다독여 주었던 게 아닐까 하고.
28등, 30등, 25등 31등. 책 보통이 들고 다니던 시절 나의 성적이다. 제도권 교육 동안 부모님이 자전거 경품까지 걸며 오매불망하던 1등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만져질 수 있는 등수였다. 뛰어나지 못했지만 주눅 들었다거나 나의 그렇고 그런 실력을 부끄러워한 기억은 없다.
난 중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성적을 마음에 들어했다. 중간에는 희망과 절망이 내재돼 있다. 약간의 플러스 마이너스 요인에 따라 탈바꿈되는 가변적 속성이 있어 어쩌면 심약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지루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앞에 앉았던 녀석처럼 상위권으로 집입 하기 위해 기 쓰는 녀석들은 죽고 싶었겠지만 마음을 비운 내게 중간이란 성적의 의미는 디딤돌이었다.
높게 올라가고 싶다면 언제든 밟고 도약할 수 있는 디딤돌. 가능성을 담고 있는 꿈의 보고.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했다. 차라리 바닥이라면 기대도 희망도 없다. 문제는 1등이 될 수도 있다는 중간자적 입장이 갖는 일만의 가능성에 있었다. 극성이다 싶은 어머니는 보약까지 먹여가며 정진하길 독촉했고 오르지 않는 성적 앞에서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처방하곤 했다.
어머니는 내 실력이 거기까지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한 나는 묘안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 가가멜이 보내는 통지표는 1번부터 58번까지의 성적이 다 나와있는 전체 성적표였다. 성적에 관한 절망감과 타인의 비웃음까지,, 한 번의 발송으로 두 가지 효과를 노린 야비한 성적표였다. 물론 그는 각성을 원했겠으나 적어도 내겐 그랬다.
별다른 노력도 없이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먼전 랭킹 4위를 마크하는 송 모구의 성적표 부분을 오렸다. 그렇다. 오린 내 성적표와 그 녀석의 성적표 위치를 바뀌는 것이다. 오린 자국은? 가지런히 위치를 잡아 풀로 붙인 뒤 복사 한방이면 끝난다.
어설픈 칼질과 풀 자국으로 당장이라도 들통날 것 같지만 복사기에서 꺼내는 순간 담임이 갓 넣은 통지표처럼 감쪽같아지는 것이다. 첨부하자면 3천 원짜리 학교 직인도 하나 팠다. 고3 때 난 그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진한 효도로 세월을 보냈다.
이 성적으로 대는 불가능하군요. 대를 우기는 어머니 앞에 가가멜은 내 실제 성적표를 내밀었고 불쌍한 어머니는 3초 만에 쓰러지셨다. 그 기억을 제외하면 중간이란 명제로 인해 손해 본 것 없는 나름대로 보람 있는 학창 시절이었다.
라틴어 금언 가운데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말이 있다. 일견 모순된 듯 하지만 졸속과 태만,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강조하는 이 금언이야말로 성질 급한 우리가 음미해 봐야 할 지혜인 듯하다.
여유를 가르치는 가을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삽상한 가을 하늘은 사람들을 절로 풍요롭게 만드는 듯하다. 세파 속 시달리는 딱딱한 내 가슴에도 시답지 않은 시집 한 권을 품게 만드니 말이다. 여름을 좋아하는 김 부장은 작열하는 태양이 주는 화끈함이 좋다고 하고, 아내는 사람들을 품게 하는 아늑함을 이유로 그 반대의 겨울이 좋다고 한다.
화끈하지도 아늑하지도 않지만 괜스레 여유로운 마음을 만들어 주는 이 가을을 나는 좋아한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준비해야 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선 열기를 다스려줄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내 마음의 평안만 유지된다면 그저 만사가 편한 가을.
이 가을엔 아이들과 이제는 젊게 보이고자 손바닥만한 미니스커트를 시도 때도 없이 입으려 드는 마누라를 데리고 산행에 나서야겠다. 자연이 부리는 여유로움 속에서 그동안 쌍둥이 녀석들이 유치원에서 배운 가무를 감상하며 내숭 떨던 그녀의 지난날에 대해서도 따져 봐야겠다.
예전에는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로 나뉘던 것이 이제는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로 나뉜다고 한다. 차고 넘치는 정보들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손에 잡히는 수확도 중요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끊임없는 수양을 쌓는다는 것, 중요한 삶의 지혜다.
그 기저에 극단의 화를 면할 수 있는 중용을 새겨 두어도 괜찮겠지.
그것이 진짜 내 것이 된다면
한 걸음 물러나 있어도
그런 나를 웃으며 바라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