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학교 3학년, 그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저는 504호에 살았고 그는 505호였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그는 집 앞에 있는 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가끔 술냄새를 풍기며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에게 저는 그냥 옆집 조무래기였을 테지요.
그를 의식하게 된 것은 이사한 첫날부터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제 방 창문으로
복도 난간에서 담배 피우는 그의 옆모습이 보였습니다.
‘뭐야, 연기 들어오잖아’
그는 밤만 되면 세네 번쯤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숙제를 할 때도 라디오를 들을 때도 매캐한 냄새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담배피는 옆집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냄새가 아니라 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에 처음 눈을 뜬 순간이었지요.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냥 마주치는 게 다가 아니라 내 이름도, 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 지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다 이야기해주고 싶어졌습니다.
담배 피는 그를 창가에서 몰래 훔쳐볼수록 가슴속 꽃망울은 점점 더 부풀었습니다.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있었고,
엄마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안녕하세요" 인사라도 해보면 좋았을텐데
후들거리는 다리와 두근대는 마음을 감추기에 바빴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방법을 찾았습니다.
분위기 있고 교양 있으며 무엇보다 여대생처럼 보일 수 있는 좋은 방법.
엄마가 청소할 때 매일 트는 팝송 테이프를 가져왔습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몇 번이고 혼을 불어넣어가며 간절히 불러 보았습니다.
그 노래는 팝송이 아니라 애간장 타는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세레나데였습니다.
팝송을 즐겨 듣고 어른스러우며 매력적이고 왠지 여대생 같은 느낌의 중학생
이것이 그에게 비춰지길 바란 제 모습이었습니다.
말을 걸 수 없으니 그 팝송만이 내 마음을 전해줄 모든 것이었습니다.
가사 내용도 아니 그것은 그냥 영어로 된 노래라고 생각했지 내용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낮게 깔리면서 묘한 매력을 주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쿵짝!쿵짝! 살짝살짝 들어가는 드럼인지 뭔지 모를 흥겨운 비트가
그와 나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듯 경쾌하고 맑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10여 초 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입니다.
방에서 옆 집 소리에 초집중하고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게 오빠인 것을 확인하면 심호흡을 하며 테이프를 틉니다.
늘 즐겨 부르는 노래처럼... 팝송이 몸에 익은 것처럼 노트를 보며 노래를 불러제꼈습니다.
노트에는 빨간 글씨로 ‘더 크게’, ‘더 예쁘게’ 등 나만의 해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노래 속 남매 가수가 파란 눈으로 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셋은 하나가 되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삼 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창문 열어 놓고 팝송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지친 나는 싱겁게 짝사랑의 막을 내렸습니다.
대학생 오빠도 그 팝송도 다 잊고 사회인이 되어 생활하던 어느 날.
예능에 내 오리지널 팝송을 흉내 내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배꼽을 잡았고 그 사람은 인기몰이에 속력을 더해 음반까지 냈습니다.
저거 내 노랜데, 가사도 완전 똑같잖아.
잡거드워(Top of the World)
써치프린즈 커민오버네이(Such a feelin's comin'over me) 델이즈 원네인모어 에브리씽에즈씨(There is wonder in most every thing I see) 나리즈크락 온더스카이(Not a cloud in the sky) 갓투썸인마이아이(got the sun in my eyes)
제 히어링 능력에 무한한 박수를 보내며...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팝송 하다 끝낸 짝사랑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