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것, 그 어렵고도 소중한 일
“왜 이렇게 어리숙하냐!”
엄마는 저를 보면 걱정하셨습니다. 간혹 순수하다며 치켜세워준 사람도 있었지만, 반복되는 설명에도 이해를 못하고, 행동까지 굼떠 그런 저를 짜증 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남들에 비해 저는 모르는 것이 많이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모두들 눈치챈 이야기를 저 혼자 모르고 있거나, 오랫동안 이용당하면서도 그 사람이 나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거나, 뒤통수를 후려쳐 피를 보고서야 내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 것도 여러 번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보였습니다. 나만 손해보고 있다는 거, 나만 참고 있다는 거, 나만 양보하고 있다는 것을. 피해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라는 것 자체가 쌍방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요.
원인이 무엇이었건 그런 제가 싫어졌습니다. 깐깐하게 이야기하려 노력했고, 손해 안 보려 자꾸 돌이켜 계산하고, 빠릿빠릿하게 행동해서 나를 물로 보지 않게 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던가요.
저는 지금까지 몇 가지쯤 되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 문화부 기자로 일할 때가 있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7월의 어느 날, 변두리 아파트 관리사무실 한편에 둥지를 틀고 있는 봉사 단체 취재에 나섰습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지역 어르신들이 모여 결성한 그 단체는 꽤 적극적인 활동으로 지역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하신 회장님과 눈매가 선해 보이시는 총무님, 두 분은 지금까지 진행한 봉사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소상하게 전해 주셨습니다.
고령의 연세에도 이웃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애를 쓰시다니… 감명 깊게 들으며 쉴 새 없이 받아 적는 한편으로, 거친 손으로 내놓으신 새우깡과 토마토 주스가 자꾸 걸렸습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막걸리라도 사 올 걸…. 누추한 공간과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새우깡이 왠지 짠했습니다.
“힘들게 오셨는데 차비에 보태 쓰세요.”
취재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는데 회장님이 돈봉투를 건네셨습니다. 제가 느낀 감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봉사단체의 자애로운 회장님 인상과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기자가 되고 한 달쯤 지났을 때로 기억합니다. 시집을 출판한 시인에게 처음 돈봉투를 받았습니다. 극구 사양했는데 결국은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세가 많은 할머니 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일 저녁, 아무리 생각해도 그 봉투를 가지고 있을 수 없어서 남자 친구의 차를 타고 집 근처로 가 다시 돌려 드렸습니다.
다음날 팀장에게 보고 겸 상담을 했을 때 “시인? 그럼 얼마 되지도 않겠네. 뭐 그런 걸 일일이 얘기 해?” 짜증 섞인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사내 소식에 정통한 김기자에 의하면 팀장은 돈 냄새 나는 취재를 만들어 가며 하고 있었고, 취재하다 광고도 따내며 커미션까지 챙기는 나름 잘 나가는 기자였습니다. 팀장은 ‘알아서 하라’며 성가셔했습니다.
그날, 회장님은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셨습니다. 가는 길을 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부득불 빗속을 저와 함께 걸으셨습니다. 금세 옷을 다 적셔버린 세찬 비가 걱정스러웠지만, 참 감사했습니다.
“힘드실 텐데 제가 활동비라도 보태드리고 싶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저는 열심히 기사 쓰는 것으로 힘을 보태겠습니다.”
돈봉투가 건네 졌을 때 저는 영화에 나오는 정의롭고 강직한 기자처럼 말씀드렸습니다. 당황하신 기색의 역력해 죄송했지만,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헌데…. 그 뿌듯함이 후회로 바뀐 것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회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그 돈을 받았어야 했나 하고.
월급은 두 달치 밀려 있었고, 마감이 급한 취재를 할 때는 택시를 몇 번이나 타야 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삼키는 사람도 있었지만, 봉투를 끌러 회식으로 돌리는 정 많은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부원들과 삼겹살을 같이 먹었어야 했나….
허나 이내 그 생각을 털었습니다. 그 돈을 받아 혼자 쓰던, 여럿이 쓰던 두고두고 그런 저를 후회했을 테니까요. 잠깐 즐거울 수 있겠지만 낯 부끄러운 일은 오래도록 자신을 괴롭히니까요. 앞으로도 있을지 모를 일에 대한 기준을 세워 놓으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신문이 발행된 후 몇 부 챙겨 보내드리고 서로 감사 인사를 나눈 뒤, 저는 다시 바쁜 신입 기자 생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렇게 12월이 됐고, 그날도 정신없이 마감을 치고 있었습니다.
“빨리 국장실로 가 봐! 국장님 호출!”
뭐지? 바짝 긴장하고 국장실에 들어가니 그때 그 봉사단체 회장님과 국장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어? 회장님,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 별고 없으시지요?” 뜻밖의 만남에 깜짝 놀라 하며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국장님은 환하게 웃으시는 회장님께 맥락 없이 제 칭찬을 시작하셨습니다. 얼떨결에 앉아 있던 저는 불편해져 마감 핑계를 대며 서둘러 방을 나왔습니다.
마감을 끝냈을 즈음 국장님은 다시 저를 부르셨습니다. 회장님은 성금 전달을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연말이 되면 각 신문 방송사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그 봉사단체는 구독률이 가장 높은 D신문사에 성금을 내왔지만, 올해부터는 저희 신문사에 성금을 전달하겠다는 말씀과 비 내리던 그날의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잘했다!”
국장님은 제 어깨를 두드리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제게는 나름 감동적이었던 드라마 같은 사건이 몇 건 있습니다. 회장님의 돈봉투 이야기처럼 대단할 것 없는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그런 일들을 한 번씩 겪으면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행동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 내가 사는 방법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이제 돈봉투를 대놓고 주고받는 일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없습니다. 이 사회는 그렇게 달라졌건만, 저는 여전히 어리숙하고 답답한 사람입니다.
상처 입고 괴로울 적엔 똑같이 갚아주마! 표독스럽게 되뇐 적도 많았고, 실제로 독기를 품고 삐딱선을 타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불끈 거머쥐었던 손아귀의 힘이 슬며시 풀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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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쉬울 것 같지만 정말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일’인 듯합니다. 마구 부풀려 잘난 것처럼 자신에게 사기 치는 일도, 굳이 자신을 평가절하하며 괴로워하는 일도 옳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내가 아플 뿐입니다.
젊은 날에 비하면 저는 좀 독해지고 비겁해지기도 한 것 같지만,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를 인정합니다. 온전히 사랑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저로 향하는 길을 정직하게 걸어 보려 합니다.
이제야… 그 길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