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시작은 같은 반 친구의 실수에서
달콤한 '연애'와 현실을 살아가는 '결혼'이 다르듯, 한 나라를 '여행'하는 것과 그곳에 짐을 부리고 '생활'해 나가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이질적인 정서와 그 나라 고유의 역사∙사회적 부산물이 좀 더 깊숙이, 날 것으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 살았다고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그 사회 속에 들어가 부대끼며 생활했나, 얼마나 안테나를 높이 세워 내 나라와는 다른 타국의 문화를 수용하려 하는가 하는 마음가짐이 그 다름을 느끼게 한다. 동경에는 한국 상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이 있고 우리 가족은 그 언저리에서 생활했다.
첫째 아이는 동경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 학교에서 초등학교를 마쳤으나 둘째는 추첨에 떨어져 우리는 뜻하지 않게 일본 사회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입학식 때 울려 퍼진다는 기미가요, 5학년 역사 시간에 나오는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 관련 수업, 한국 아이라 김치라고 놀림받는다는 지인의 고민….
'나도 학교에 간다'며 마냥 신난 아이가 엄마의 불안을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히 걱정을 눌러가며 그렇게 아이의 일본 초등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은신처를 찾는 독립투사와 접선하는 심정으로 아이를 기다렸다. 한국 아이라고 차별하는 선생님은 안 계실지, 학교 관계자 중 우익은 없는지, ‘김치’나 ‘독도’를 운운하며 짓궂게 구는 친구는 없는지, 웃으며 집에 들어서는 아이의 얼굴을 볼 때까지 마음을 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뉴스를 연일 장식하던 화제는 ‘바퀴벌레 같은 재일 조선인을 내쫓아라!’ 주장하는 우익 단체의 전국 규모 ‘헤이트 스피치’였다. 재일 한국인들은 불안에 빠졌고, 타깃이 된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에서도 그 행렬은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다.
다행히 등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은 기대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여느 엄마들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으며 아이의 성장을 체감하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했다.
급식에 비빔밥이 나왔는데 집에서 먹는 것이랑 달랐다든지, 한글이 쓰여 있는 지우개를 보며 아이들이 신기해했다든지, 3학년 언니들과 함께 짝을 지어 노는 시간이 즐거웠다든지… 지레 걱정했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나 놀림 없이 아이에게 학교는 일본을 배울 수 있는 즐거운 장소가 되어 주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돼 지금 한국의 입학식은 좀 다를지 모르겠다. 내게 입학식은 꽃다발과 사진으로 기억된다. 집안의 기념비적인 행사로 가족들이 참석하고, 행사 후에는 외식을 하고 선물을 받는 정도, 입학식 날에 대해 남아 있는 학교의 추억은 교장 선생님의 따분한 훈화 정도일까.
둘째가 경험한 일본 초등학교의 입학식은 좀 달랐다. 학교의 막내인 1학년을 처음 만나는 입학식에서는 연극, 합창, 합주 등 각 학년별로 축하 행사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그날의 주인공이 되고 행사가 끝나면 이 귀염둥이들은 6학년 언니 오빠들이 만들어준 아치 모양의 근사한 꽃 터널을 통해 교실로 이동하며 행사는 끝난다.
내가 경험한 일본 초등학교의 입학식은 매년 치르는 연중 행사가 아닌, 선생님과 재학생이 마음을 담아 정성껏 준비한 세레머니였고 단상에 올라 얼어붙어 있던 1학년 신입생들의 얼굴이 본래의 개구진 웃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같은 맥락으로 6학년이 졸업할 즈음에도 비슷한 행사(6年生を送る会)를 한다. 그날도 여느 해처럼 전교생이 모이는 행사가 열렸고, 1학년은 졸업생을 보내는 아쉬움을 담은 편지를 반 별로 읽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2주 전부터 아이들은 강당에 모여 연습을 해왔고 드디어 당일이 됐다. 학년별로 하는 행사지만 그래도 무대에 서는지라 '아이가 많이 떨렸겠다' 생각하며 신호등 건너편에서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마도카짱과 이야기하며 오는 딸아이가 보였다. 헌데 나를 발견한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이는 울먹이며 ‘와락’ 나를 안더니 훌쩍이며 이야기했다. 그날 상황은 이랬다.
2주간 연습은 물론 마지막 리허설까지, 행사를 마침과 동시 1학년은 전원 교실로 돌아가는 것으로 연습했는데 당일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행사가 끝나도 나머지 학년과 함께 체육관에 남아서 모든 행사를 지켜보는 것으로.
헌데 선두의 아이가 지금껏 연습했던 대로 교실로 향했고 그 아이를 따라 딸아이 반 아이들은 모두 교실로 돌아갔다. 반 아이들의 실수에 선생님은 무섭게 화를 내셨고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내셨다. 너희들 때문에 중요한 행사가 엉망이 됐다고…. 울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은 ‘무서운 괴물처럼 화를 내면서 우셨다’는 것이 아이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의 연습과 달리 당일 구두로 전달된 사항이며, 경험이 많지 않은 1학년 학생들의 일이니 선생님들이 좀 더 세심하게 실수가 없도록 대비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실수를 용납 못하는 완벽주의자도 있는 것이니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딸아이의 이야기가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흘렀다.
선생님은 ‘너희들 때문에 오늘의 중요한 행사를 다 망쳤고, 전교생에게 폐를 끼쳤으니 모두 1학년 각 반에 가서 사과하고 오라’고 지시하며 30명 아이들을 다른 반으로 보내셨다. 아이들은 3반, 2반, 1반 모두 돌며 울면서 사과했다.
돌덩이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다른 문화, 다른 세대, 다른 가치관, 책임감, 사명감… 그 어떤 단어를 갖다 대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실수를 대하는 시선부터 달랐을 것이다. 같은 상황이 한국 학교에서 벌어졌다면 체육관에 있던 모두들 웃으며 '역시 귀여운 1학년의 헤프닝' 정도로 넘겼을 것 같다. 선생님의 대응에 대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개인 및 반 단위의 거센 항의가 있지 않았을까.
매스컴에 제보라든지, 담임은 물론 교장 혹은 교육청에 진정까지 1학년 학부모의 적극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만원 지하철에서는 의도치 않게 남의 발을 밟거나 밟히는 일이 생긴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밟은 사람, 밟힌 사람 모두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일본 사회라는 점이다. 밟은 사람의 사과야 당연한 일이지만, 밟힌 사람은 왜? 내 발을 밟게 만들어 상대가 사과하게 만든 폐를 끼쳐서다.
일본의 부모들이 아이를 키울 때 가장 강조하는 교육은 ’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성장하면서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교육의 주요 덕목이며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의식을 지배한다.
30명이나 되는 그 많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바람대로 정녕 자신들의 실수로 행사를 망친 것을 후회하며, 반성하며 내내 운 것일까. 울면서 무섭게 화를 내는 선생님이 무서워 운 것은 아닐까. 선생님을 저렇게까지 만든 자신들의 잘못에 겁이 난 게 아닐까. 아이들의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다른 반에 사과하고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또다시 울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한다.
“엄마! 나도 아이들도 다 울고 있었고, 선생님은 가만히 계셨어. 그래서 내가 손을 들었어”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 손을 들었다고? 원인과 과정이 어떻든 그 순간 선생님은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하려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게 확실한데 너는 그 분위기를 와장창 깨며 손을 들었다니.
“그 상황에서 무슨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거야? 뭐라고 했는데?"
다급히 물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우리들이 울고 있지만 내일은 웃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지금부터 웃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딸아이다운 생각이었다. 내가 복잡한 얼굴을 하자 아이가 덧붙였다.
“친구들이 너무 오래 울어서 불쌍해서….”
꽤나 어지러운 심경이 됐다. 나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지만, 어떤 식으로든 주류가 아닌 삶은 외롭고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딸아이는 자기가 속한 세상의 흐름을 잘 타서 안전하게 아프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딸도 두려웠을 것이다. 친구들을 위해 낸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나 아이 역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회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정해 놓은 암묵의 룰이 있다. 나아가 지금은 1학년이니 간단히 끝나지만 고학년이 되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잘난 척한다는 왕따를 면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어. 우리 딸도 무서웠을 텐데 친구들을 위해 용기를 냈구나”
금방 칭찬해 주지 못해 미안해하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딸은 상처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며칠이 지나 슬쩍 아이를 떠보았을 때, 아이는 여전히 선생님이 좋다고 했다.
'괴물처럼 무섭게 화내며 친구들을 울린 그 얼굴'을 잊고 말이다.
이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의견은 어떠냐고. 아이들은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의 웃음으로 다 같이 웃고 끝났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이 보호자회였다.
나는 일이 있어서 참가하지 못했으나 거기서 학부모들이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제의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없었고 선생님이 말미에 그날 이야기를 하시며 ‘1학년이라고 실수를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는 보고 형식으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궁금해졌다.
일본 엄마들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담임 선생님은 7살 어린 아이가 친구를 위해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자신이 생각한 흐름을 깨버려 괘씸했을지, 본인의 지나친 감정 분출에 대해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는지, 정말로 아이들이 실수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앞으로 살아가며 있을 실수가 줄어들기 바란 것인지.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이 상황을 이야기하니 ‘잘못을 했으면 그에 따른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 두 사람, 선생님의 처사가 심했다는 사람이 한 사람, 선생님이 심한 면이 있지만 선생님 입장이 이해된다는 사람이 한 사람이었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근간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일본 학교에 보내며 느낀 일본 교육은 섬세하고 철저하지만, 자신을 죽이며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아둥바둥하는 느낌이다. 남과 같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이질감을 느끼면 불안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의성이나 개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일본 교육의 틀에서 자식을 키우는 한국인으로서 앞으로 어떤 교육관을 가져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됐다. 일본 사회를 냉철히 분석하고 바르게 이해하면서 한국인의 긍지를 살려 조화를 이뤄나가는 삶. 어렵지만 그것이 중요한 나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