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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있는 신입도 안 뽑아주면 어딜 가야 하나

찰떡 직업을 찾는 모험 ep.28

by 일라

얼마 전에 상담사 채용 공고에 지원서를 넣고 다음 일정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이동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원래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데, 취준 기간이라 혹시 몰라 웬만하면 받고 있다.


전화를 받아보니 외출하기 전에 지원서를 넣은 곳이 아닌가!

기대 한 스푼을 솔솔 뿌린 마음으로 내용을 들어봤는데, 나에게 상담사 자격증 취득일을 물어봤다.


약 3년 이상의 경력직을 뽑는 공고였는데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의 경력만 본다는 것이었다.

설렘이 차게 식은 나는 방금 전에 뿌린 기대 가루를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 왜 지금까지 서류 합격도 힘들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격증 취득 전이나 후나 상담 경력이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자격증을 따려면 상담 경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는 자격증을 따기 전의 내 경험을 경력으로 쳐주지 않았던 거다.

그럼 자격증을 갓 취득한 상담사는 어디서 일하나?

내가 회사에 다니느라 공백 기간이 없었다 해도 대학원 졸업과 함께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는 상담사로 취업하려고 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대학원 졸업 후 동료 선생님들이 바로 유료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소에 취직하기가 어려워서 무급으로 일했던 게 생각났다.

인턴이라는 명목 하에 무급으로 몇 년 일하다가 경력이 좀 더 쌓인 후 돈을 받을 수 있는 상담소로 이직하는 것이다.


전에 무급으로 8개월 정도 매주 행정 업무 이틀 및 추가 자잘한 업무들을 도우면 상담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공고가 떠올랐다.

3개월도 아니고 무려 8개월을 행정 업무도 병행하며 무급으로 일하는 건 내 니즈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지원하지 않았는데, 그거라도 할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다가 허탈함이 밀려왔다.


'돈 벌려고 시작한 취준인데 돈을 안 벌면 무슨 소용이지.'

내가 왜 이 업계를 떠나려고 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약 5년을 더 일해서 1급 자격증을 따면 유료 상담을 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데, 그럼 그 사이 나의 5년은?


예전부터 무급으로 인턴을 하는 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무급의 이유는 돈을 많이 버는 상담소들이 잘 없기도 하고 이미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돈을 내고 인턴을 하는 경우도 꽤 많은데, 안 그래도 돈이 부족한 대학원생에게 그건 좀 가혹한 것 같아 그런 곳은 피했었다.


석사까지 나와서 무급이라니. 그것도 몇 개월도 아닌 최소 몇 년을.

누군가는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배워서 전문성을 갈고닦으면 될 일이지 않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현 사회의 사회초년생에게 무급으로 일하는 건 삶을 살아갈 때 필요한 필수적인 돈조차 벌지 못한다는 의미다.


성인이 되고 대학원까지 졸업했는데도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용돈조차 부모님께 받아야 하는 죄송한 상황이 생기고, 혹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잡, 쓰리잡까지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무급으로 일할 곳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요 몇 개월 동안 채용 공고를 하나하나 살펴봤을 때 무급 공고는 위에 말한 곳 한 군데였다.

나머지는 자격요건에 자격증 취득 여부만 쓰여 있어도 암묵적으로 경력 있는 경력자를 뽑는 곳들이었다.


경력 있는 신입도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니, 언제 이렇게 고용 현장이 더 팍팍해졌을까.

다른 업계도 요새 취업이 힘들어졌을 텐데 어떤 상황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일단 상황은 벌어졌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봤다.

다시 시작한 상담 공부가 꽤 재미있기도 하고, 취득한 자격증을 그대로 두는 것도 아까워서 우선은 계속 지원해 보기로 결정했다.


대신 상담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면 거기에도 지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무급으로 일하는 거 내 재능이 정말로 필요한 곳에 재능 기부를 한다면 뿌듯함이라도 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대신 무급으로 일하는 곳은 일주일에 며칠만 일하는 곳을 찾고, 나머지는 지금 계속하고 있는 캐릭터 사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궁리를 해보기로 했다.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중에 어떤 곳이든 도움이 되는 곳이 생기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면 뭐라도 되어있겠지!





찰떡 직업을 찾아 모험하는 강아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www.instagram.com/illam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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