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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유랑자 Sep 24. 2021

적당한 거리감이 매력

가족에 대한 거리감도 조금은 달라 보였던 스웨덴



스웨덴에서는 personligt utrymme가 매우 중요하다. 이 뜻을 한국어로 해석하면 자기만의 거리감 정도로 칠 수 있겠다 물리적인 거리든 심정적인 거리든 자기 팔을 뻗어서 닿을 거리는 조심해야 하고 그것이 룰이다. 그것은 비단 가족이어도 마찬가지다. 스웨덴도 꽤 가족적인 분위기의 사회 치고는 상당한 개인주의의 나라이기도하다. 그렇다 보니 연인이든 가족이든 나 가 아니면 타인이다. 그리고 집단에 속해있다고 해도 개인도 존중받는다 앞서 말한 라곰의 문화이긴 하지만 그것은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웨덴에서는 싱글맘도 싱글대디도 이혼가족도 굉장히 흔하다. 너는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라는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디, 맘 마더사이드 스탭브라더 이렇게 있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재혼을 하더라도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엄마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아이의 자율권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많은 스웨덴 친구들 역시 스텝파더나 마더가 있지만 그들을 엄마나 아빠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주로 친구처럼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굉장히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이전 가정의 폭력으로 아버지나 어머니 존재를 아이에게 숨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통상적으로 스웨덴에서는 이혼가정의 면접교섭권 등은 매우 중요한 의무사항이다. 많은 아이들은 심지어 2주는 아빠 집 2주는 엄마 집에서 자라는 경우도 많다) 보통 그렇다고 한다. 적어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여자를 데려와 아빠 애인이야 엄마라 불러 같은 일은 없다는 이야기다. 그 정도로 가족 구성원 혹은 아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나는 재혼한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에게 새어머니나 새아버지를 아빠나 엄마라고 부르라는 건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특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 결국은 그 부분을 강요해서 나중에 반쯤 포기 혹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갑자기 새로운 부모가 생긴다고 받아들이라는 것은 좀 심하지 않나 생각했다. 물론 재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새로운 결혼은 일방적으로 부모에 의해서 선택지 어지는 부분 인대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아무 선택권 없이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이런 무거운 이미지 때문에 재혼가정에 대한 편견조차 생겨진다고 생각한다. 이혼도 재혼도 삶의 한 부분이고 누구나 그런 선택을 해도 나쁘지 않다면 그 호칭이 뭐가 필요할까 싶다



한국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는 거의 동체만큼이나 거리가 없다면 없다(물론 우리 집은 안 그런데!라는 분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나의 세대 혹은 나의 다음 세대까지는 대부분 부모의 큰 희생이나 부모가 자아를 버리고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아이를 위해서 이사를 하고 아이 때문에 직장을 옮기고 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 또한 아이를 낳는 동시에 부부는 아이 중심의 사고와 생활 반경과 태도 모든 것이 아이에게 재편된다. 그렇다 보니 비단 부모만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모르지만 그 과정들 속에 자식들 역시 희생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에게 쏟다 붓는 부모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혹은 부모나 나를 기대하는 사람이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않기 위해 심한 경우는 자식과 부모를 넘어 일방적인 한쪽 형제의 희생도 가끔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은 성년이 돼서도 성인이 되지 못한다. 여러 가지 금전적인 이유를 차지하더라도 부모님과 살고 용돈을 받고 형편이 좋으면 집을 받고 결혼을 할 때 부모가 돈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부모가 집을 주는 것이 스웨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누구나 다하는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결혼하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면 자책하는 부모가 많다. 그렇다 보니 한국과 스웨덴과 부모나 가족을 바라는 태도 자체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시도 그런 부모의 희생을 바탕으로 살았고 그랬기에 많은 것을 누리고 경험한 것은 인정하나 항상 부모님에겐 마음속에 부채의식이 있었다. 기대대로  자라더라도 언젠가 효도를 해야 한다던지 어느 해부터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 인생을  누리고 살길 바랬다 허나 그들을 그렇게 살아온지 30년이 넘어서 어느  문득 하려니 방법을 잊어버리신  같았다. 어쩌면 반대로  역시 나를 위해 희생해  사람에게 누릴 것은 누리고 이제 와서 자기 인생 사세요 하는  폭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웨덴에도 가족 때문에 고통받지 않은 사람을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훨씬 빈번하게 표면적으로도 접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누군가  친해서 그런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스웨덴에서는 가족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나와 친분이 없어도 회사 동료라던지 대학에 서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또한 심각한 문제의 가정은 아니지만 한쪽이 일방적인 정신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의무나 사회통 등을 이유로 뿌리치지 않은 경우도 많이 보았다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차이를 많이 느꼈다. 단순히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누군가와 살아내니 힘들다면 그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도 더 이상은 누군가의 희생보다는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은 변하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는데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에 묶여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만을 가족으로 정의하며 의무를 주는 것이 사회가 주는 폭력이 아닐까? 나아가서 그런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여야 다양한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적당한 거리감이나 자기만의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중요한 것은 거리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니까 말이다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거나 24시간 함께한다 하여 그 관계가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가깝기에 일정 부분은 선이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매너나 예의는 사회생활 속에서 만나는 타인뿐 아니라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지켜야 한다. 그래야 더 건강한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변하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가는 만큼 혈연이라도 건강한 거리감은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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