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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유랑자 Apr 19. 2022

돈 이야기 / 지금은 돈 모으는 게 좋다

나는 원래 욜로족이였다

나는 꽤 오랜 세월을 욜로족으로 살았다. 버는 족족 돈을 썼다. 그리고 해외여행이 취미였다. 스웨덴에 가서 살기 전부터 두 달에 한 번씩은 비행기를 탔고 유럽을 세 번이나 가봤었으며,  그 마일리지로 스웨덴에 이주할 때는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도 남을 정도로 마일도 쌓았고 20대에는 명품도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철도 없었고 사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직종이다 보니 그렇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어쨌든 부모님 집에 함께 살고 있으니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버는 족족 다 지출했다. 비상금이 100만 원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마음이  심해졌다. 삶은 유한하고 아껴서  하지 싶은 마음도 컸다. 게다가 나는 비혼주의자였기에  혼자 건사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돈은  좋아했다. 어쩌면 이렇게  계기는 형편과 상관없이 소위 말하는 부자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의 최고 학군지인 대치동에서 자랐고 그중에서도 대치동에서 가장 학군지로 꼽히는 사립명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 대치초등학교를 나왔다. 나는 한국 나이로 10살이 되던 해에 전학 왔는데  아이들의  질문은 “니네 집은  평이야?”였다 솔직히 굉장히 문화충격이었다. 아이들은 엄마 차는 뭐냐고 물었고  나아가 담임이라는 작자는 아파트 별로 청소시켰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학교로부터 거리에 따라 가격이 올라갔다 학교에 가까울수록 집값이 비싸고 평수도 넓었다. 담임은 차별이  심했고 청소도 우성 여자, 선경아파트, 청실 이런 식으로 아파트 이름으로 지었으며 담임은 하교할  같이 가라고 하는 의도라 했지만  시절에도  의도가 아닌 것을   있을 정도였다.  담임의 기억나는 모습  하나는 당시에 우리 엄마는  자주 아파서 도시락을 사가는 날이 종종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는데 나는 어리고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담임에게 죄송하지만   따주실  없냐고 물었고(전학 오기  학교는 묻지 않아도 선생님이 해주셨다)  그녀는 정말 나를 경멸스러운 눈으로 “선생님한테 드리지는 못할 망정 따달라고 ??”라며 나를 혼냈고 나는 제대로 점심을 먹지 못한  기억한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내가 그런 일을 집에 가서 엄마에게 울며 말하고 엄마가 학교를 다녀  뒤로 그쳤다, 특별히 잘해주진 않았지만 괴롭히진 않았다(할머니가 되었을 텐데 얼마나  사는지 가끔 궁금하다) 그러고 나서 훗날 교사로 재직하는 친척에게 엄마가 대화하다가 대치동으로 이사 가니 학교에 돈이 많이 든다라고 하니 “원래  학교 배정받으면 교사 사이에서 집산 다는 소문도 있다니까라는 말을 지나가며 들었고 엄마가 촌지를 갖다   알았다.   시절은 그냥 촌지가 흔했다. 촌지를 준다고 편애받지 않고 받지 않은 애는 괴롭힘을 당하고  많이 드려야만 예쁨 받았다. 친했던 친구 중에  명은 부반장을 맡았는데 그녀의 담임이 “니네 엄마는 교수씩이나 되면서 학교를  번도  오니?’라고 들은 기억이 상처로 남을 정도로 그랬다. 그래서인지 나는 돈의 중요성을  일찍 떴다


슬프게도 우리 집은 여기서 비등하게 돈을 쓸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가난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정말로 말 그대로 여유롭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힘들게 벌어야 우리를 뒷바라지할 정도였고 힘들게 입시미술을 시킬 정도의 형편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꽤 여유로워서 나는 빈부격차라는 것을 사회에 나오기 훨씬 전부터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부터 초등학교까지 알던 당시에 꽤 친했던 친구 중에 모 그룹 사장님 딸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고등학교 때 아침 조회를 나가기 싫어서 늘 만원을 주고 주번에게 주고 주번을 바꿔 교실에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욕을 했지만 돈은 받았다. 나는 그녀와 꽤 친했고 중학교는 우리보다 더한 명문예중을 나온 그녀는 돈의 힘을 아주 잘 아는 친구였고 나는 그 친구를 생각해서 아이들이 너 그러는 거 욕한다 나도 안 했으면 좋겠다 하니 “ 걔들은 주번을 나가는 가치보다 만원이 더 가치 있는 것일 뿐이고 나는 주번을 안 나가는 것이 만원의 가치보다 더 높을 뿐이야”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지금도 선명할 정도로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당시에 내 경제적 그리고 사회 불평등에 관한 완벽한 확립이 덜 되어서인지 그녀의 대답이 나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아 집이 좀 잘 사는 애들은 다 저렇게 교육받고 자라는구나라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아마 과거로 돌아가 그녀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똑바로 반박할 수 있지만 당시엔 그러지 못했다 당시에 강남이란 곳은 빈부차가 상당히 많이 났다. 강남 안에서도 동별 서열을 나눌 정도로 심했고 그걸 보고 자라서인지 성인이 돼서는 아무리 부자를 만나도 덤덤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남을 신경 쓰지 않은 성격이라 한 들 그런 환경 속에 있다 보면 특히 연령이 어리다면 좀 더 따라 하고 싶어 진다. 나는 그것이 소비로 이어진 거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막대한 빚을 지진 않았지만 대학교 때도 집에 용돈을 받으면서도 KFC나 맥도널드 같은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며 돈을 썼고(졸업반일 때를 제외하면) 사회에 나와 돈을 벌면서는 다 쓰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소비중독형 인간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해외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물건에 대한 집착을 줄어들었지만 소위 경험을 사는 여행은 중독처럼 다녔다 주로 혼자 다니면서 좋은 곳도 가고 가끔 마음 맞는 친구와 만나서 같이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던 즈음 엄마가 어느 날 내가 25살이 되던 해에 현금 200만 원을 주며 주식을 한번 공부해보라는 이야기를 하셨고 그때 나는 첫 투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엄마는 수익이 나면 수익은 내가 가지고 원금만 돌려달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게 시작한 투자였지만 훗날엔 이 경험도 꽤 도움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욜로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스웨덴에 가기로 마음먹은 다음이었다. 막상 떠나려니 돈이 없는 것이고 나에게 남은 시간은 8개월 정도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난생처음으로 착실히 돈 모으기를 시작했다. 해외 나가서 그 나이에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하기는 부끄러웠다. 게다가 내가 일한 세월을 생각하면 엄마가 엄청 놀라실 것이라 생각했다. 착실히 모으며 그래도 1년 정도 아끼면 체류할 정도의 돈을 모았다 스웨덴에 가기 직전까지 다녔던 회사가 바쁜 탓도 있지만 돈을 모아야 했기에 나는 출국 일주일 전까지 일하였다.


스웨덴에 정착하고 나서 나는 거의 4개월 만에 일을 시작했다. 해외에 정착해서 살다 보니  그리고 내가 집세도 내고 생활비도 내고 치약 하나도 내 돈으로 살려니 돈이 절실해졌다. 그제야 부모님을 떠나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친구의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스웨덴의 높은 월세는 돈 모으기 녹록지 않았다 나는 틈틈이 모은 돈을 주식투자를 했다. 정착을 해서 스웨덴에서 거주할 서류나 적응도 했지만 사실 본격적인 주식공부는 그때부터 하였다 그 훨씬 전에도 주식을 하였지만 그때처럼 제대로 공부하고 시작을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 스웨덴에서 살면서는 주식도 하고 프리랜서로 한국과 일하며 한국에서의 수입은 주식에 많이 투자하였고 그건 해외 체류기간 동안 많음 도움이 되었다


디자이너들 중에서는 돈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돈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삶의 영위해 나가는데 돈은 필요하다 좋은 디자인 또한 돈이 들며 나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유지하는데 또한 돈이 든다. 다음 편에는 번외 편으로 주식투자기도 쓸 예정이다. 웬만큼 쓰고 여행을 다녔기 때문인지 지금은 물건에 대한 물욕은 사라진 상태다 가끔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지금부터 시작해도 될까요?”하는데 나는 언제든 시작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잘 쓴 만큼 돈의 소중함도 잘 안다.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를 지키는 대도 돈이 든다. 욜로였지만 어느 순간에 내 몸을 뉘일 집이 없음을 깨달은 순간 삶은 변한다 지금도 걱정이시라면 오늘부터 시작하시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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