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인을 두 종류로 나눠보자.
1. 시간 날 때 읽는 사람과 시간을 내서 읽는 사람
2. 한 번 읽은 책은 다신 안 읽는 사람과 재독을 즐기는 사람
3. 읽고 난 뒤 독후감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
4. 혼자 읽는 사람과 독서 모임을 하면서 읽는 사람
5. 도서관에 가는 사람과 서점에 가는 사람
사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한쪽으로 완벽하게 치우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러나 5번, 도서관에 가는 사람과 서점에 가는 사람 항목에서 나는 작년 전까지만 해도 완벽히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학생 땐 책을 좋아했지만 거의 사서 읽지 않았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을 때라, 도서관에서 책을 한 아름 빌려 쌓아 두고 하루에 한두 권씩 읽어치웠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는 수필집이나 소설을 읽는다 치면 하루에 서너 권도 넉넉히 읽었다. 종일 책을 읽고 나서 지끈지끈 따끈따끈한 머리를 흔들며 씻고 다시 누워 책을 읽다 잠들던 날들이여. (그리워라.)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도 책을 사 읽을 생각을 못했다. 이유야 많았다. 일단 책은 도서관에서 읽는 게 습관이 되기도 했고,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기엔 세상에 책이 너무 많았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읽어야 할 책도 많았다. 한 번 보고 말 책인데 굳이 사서 집에 보관하면 짐만 많아지고... 안 그래도 작은 방을 짐(책)으로 채우기 싫었다. 나는 물건을 많이 가지면 에너지가 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 : 나의 언어로>인데, 도서관에 없었고 희망도서로 신청하면 한참 기다려야 하니까 그냥 서점에서 사서 보기로 했다.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사는 김에 다른 코너도 둘러봤다. 거의 다 신간이거나 베스트셀러고 인기가 많거나 출판사에서 주력으로 미는 책들만 매대에 올라와있으니까 다 재밌어 보이는 바람에 몇 권을 더 골라 계산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어버리고 금방 다른 책을 읽게 된다. 근데 내 돈 주고 산 책은 그러기 어렵다. 돈 주고 샀으니까 웬만하면 끝까지 읽고 싶다. 식당에도 종종 맛없는 음식이 있듯이 내 돈 주고 산 책들 중에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재미없는 책이 가끔 있어서 그런 건 읽다가 말긴 하는데 어쨌든 대부분 끝까지 읽는다. 대충 읽으면 아까우니까 좀 더 정성 들여 읽는다. 여기서 뽑아먹을 건 다 뽑아먹겠어! 하는 마음으로. 그러다 보니 더 재밌게 느껴진다.
재밌게 읽은 책은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도 안정감을 준다.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으니까. 도서관에서 볼 때는 이 책이 지금 비치돼있는지 확인하고, 예약을 하거나 상호대차를 해서 도서관에 직접 가서 책을 빌려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사서 읽으면 편하다.
책을 사 읽는 이유 중 가장 큰 건 역시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계속해서 책을 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재밌게 읽은 책에 값을 치르고, 그 돈이 작가에게 가서 힘이 되고 또 다음 책을 쓰게 하는 거지. 내가 산 건 겨우 한 권뿐이지만 어쨌든 사지 않은 것보다는 작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책값이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책은 아름답고, 한 권 사면 몇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고, 한 사람의 오랜 시간이 들어 있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겨우 이 값 주고 이런 멋진 책을 읽다니. 작가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싶을 때도 있다. 책을 사봤자 작가에게 돌아가는 인세는 겨우 10% 언저리. 그렇다면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편집자들이 쓴 책을 하도 읽다 보니 책 한 권에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 대충 안다. 책은 그냥 쓴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도 좋았다. 이 넓은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 아무거나 뽑아서 막 읽고 심지어 집에 가져가서 읽어도 되는 그 멋진 곳은 돈이 없는 나를 부자처럼 만들어줬다. 동네에 도서관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을 벌고 또 내 공간을 꾸리면서 책을 사 모으는 것이 이젠 훨씬 더 즐겁다. 앞으로도 이 재미를 누리려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 나는 책 사려고 돈 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