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심해의 취미생활 Oct 30. 2023

우리나라는 폰 노이만을 길러낼 수 있을까

20세기 최고 천재의 전기 -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 폰 노이만을 만나다


얼마 전 폰 노이만 전기를 읽었다.


나는 그를 경제학자로 알고 있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공부할 때 폰 노이만-모겐스터라는 모델을 배운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업무차 인공지능, 컴퓨팅 기술을 들을 때 폰 노이만이라는 이름을 또 들었다.

 

'똑똑한 사람들은 이름이 비슷한가? 이사람, 저사람 다 폰 노이만이야?' 싶었다.


그러다 서점에서 눈길을 끈 책을 만났다.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이란 책이다.



표지가 이뻐서 책을 들쳐봤다. 아인슈타인보다 더 천재성이 깊다는 평도 있댄다. 그래서 읽어봤다.


알게 됐다. 그 폰 노이만이 그 폰 노이만이다. 그는 물리학의 양자역학, 경제학의 게임이론, 공학의 인공지능과 컴퓨터, 국방학의 핵무기와 탄도학 등 등 20세기 인류의 지성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말 재밌는 책이다.


# 내 눈길을 끌었던 것


* 박스 안은 인용구


이 책은 폰 노이만의 생애사를 서술한다. 단순 나열은 아니고 각 분야별로 그가 이룬 성취의 과학기술적, 사회경제적 의미를 되짚어 준다.

 

나는 과학-공학을 잘 모른다. 그러니 이해가 쉽지 않다. 가령 저자는 폰 노이만의 성취인 '양자역학의 수학적 증명'의 의의를 설명하는데, 양자역학도 모르겠고 수학적 증명은 더 모르겠다.


이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면 훨씬 더 재밌게 읽었을 거다. 아쉬웠다.


내 흥미를 끈 건 따로 있다. 바로 '폰 노이만은 어떻게 폰 노이만이 됐을까'라는 점이다.


그는 날때부터 천재였다. 그렇기에 '폰 노이만'이 됐다.


아래는 그의 유년기 시절 일화다.


전설적인 수학 교사인 라슬로 라츠였는데, 부다페스트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노이만을 몇 번 대면한 후 자신을 능가할 천재임을 간파한 라츠는 부친 믹사를 만난 자리에서 부다페스트 대학교에 노이만을 위한 특별 교과과정을 개설하여 자신이 직접 강의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헝가리에는 라슬로 라츠라는 뛰어난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진 위그너'라는 과학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노이만을 몇 번 가르친 후 천재라고 간파했다. 다수의 우수 학생을 가르쳐본 그조차 천재라고 느꼈다. 노이만은 그냥 날 때부터 똑똑했나 보다.


이 우월 유전자가 역량을 발휘하게 한 요소는 무엇일까?


먼저, 그의 집안이다.


1910년에 노이만의 아버지 믹사는 유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최악의 상태에 대비하기 위해 세 아들에게 각별한 교육을 실시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헝가리의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집에서 교과과정과 외국어를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특별 교육을 받았다. 투자은행가인 부모의 재력 덕택에, 분야별 최고의 과외 선생님에게 배웠다.


교육 과정은 특별했다. 토론식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단순한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지식을 익히고 재구조화해서 체화한 후 자신의 생각으로 풀어내는 훈련을 지속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점심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꼐하면서 자신의 투자계획이라든지 세상의 이치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통으로 구매'해버리는 한편, 집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채웠다고 한다.


폰 노이만 가문은 왜 이렇게까지 교육에 신경썼을까?


“그것은 일부 사회적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개인의 성취 동기를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유태인에게 관대했던 헝가리의 분위기가 하룻밤 사이에 바뀔 수도 있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한 기자와 노이만의 문답이다. 기자가 물었다. '헝가리의 유태인들은 왜 그렇게 뛰어날까요?' 노이만이 말한다. '유태인이잖아요.'


유태인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의 사례처럼 언제든 돌팔매질 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불안한 유태인, 그렇기에 실력이 중요했다. 그래서 노이만 가문은 열심히 실력을 쌓았다.


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열심히 익혔다. 헝가리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노이만. 그는 헝가리의 위대한 과학자가 됐는가?


아니다.


약소국인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침략에 직면했다. 나치는 유태인을 핍박했다. 유태인인 노이만은 나치 치하의 헝가리에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히틀러는 '직업공무원법'을 제정하여 유태인과 공산주의 추종자들을 모든 직장에서 쫓아냈는데, 독일 공무원 중 이 조치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5%에 불과했지만 각 대학교의 물리학과 수학과는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물리학자의 15%, 수학자 18.7%가 졸지에 대학에서 쫓겨났고, 개중에는 하룻밤 사이에 교수의 절반이 해고된 대학도 있었다. 이때 쫓겨난 학자들 중 20명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을 사람들이었고, 이들 중 16명이 유태인이었다


나치 독일은 개인의 출신 성분을 중요시했다. 유태인은 하층민이었고 능력이 있어도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나치 독일은 뛰어난 유태인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했다.


이는 명백한 자기 파괴 행위였다. 왜냐하면 독일에는 뛰어난 사람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1920년대에 과학의 공용어는 독일어였다. 양자역학 논문을 쓴다고 치면,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써야했고, 독일 학술지에 게재해야 했다.


그 정도로 앞서가는 나라였다. 그런데 뛰어난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니 뒤처지게 됐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은 자신을 인정해주고 지원해주는 미국으로 갔다. 이때부터 미국은 한 차원 더 잘 나가기 시작했다.


1930년 10월 말에 위그너는 프린스턴 대학교로부터 단기 강사직을 제안받았는 데, 처음 전보를 받고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프린스턴에서 제안 한 급여가 베를린에서 받던 급여의 7배가 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천재 과학자를 잘 대우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출신 과학자 유진 위그너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괴팅겐 대학교에서 받던 월급의 7배 이상을 받았다.


폰 노이만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제안을 받았고, 미국에 정착했다. 여기에는 아인슈타인, 헤르만 바일 등 당대의 최고 석학이 몰려 있었다. 프린스턴 대학 외에도 MIT, UC 버클리, 하버드, 예일 등 미국 대학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최고의 인재'가 모인 곳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했기에 '폰 노이만'이 됐다.


특히, 노이만의 활동 영역은 대학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그의 정식 직함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교수였지만 국방부와 CIA, 그리고 싱크탱크의 대명사인 RAND 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미국 정부는 이민자인 그를 행정부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켰다.


우리로 치면 외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과학자가 국방부, 국정원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폰 노이만은 원자폭탄, 컴퓨터, 인공지능 등 20세기 인류 문명의 첨병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아무리 똑똑한 노이만도 인프라가 없는 아프리카에서는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다.


# 우리나라는?


미국이 부러웠다. 미국은 여전히 세상의 천재들을 효과적으로 유혹한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에게 '충분한 물질적 보상과 사회적 인정'을 제공하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책을 읽으면서 불안해졌다.


나는 곧 딸을 가진다. 내 딸은 나보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불안하다.


나는 한 나라가 보유한 '사람의 수와 역량'이 그 나라의 경쟁력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저출산 고령화로 대한민국 사람은 감소한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중요해진다. 한국은 다른 나라 최고 인재가 올 만큼 매력이 높지도 않다.


오직 우리가 길러내고 써야 한다. 그런데 잘 길러내고, 잘 쓰고 있을까? 잠재력이 높은 학생이나 학자는 충분히 지원하는가? 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일 하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보상하는가?


지금이 결정적인 분기점인 것 같다. 청년들이 이 땅에서 살기 힘들다고 아이 낳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이민도 잘 안 오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게 안 바뀌면, 뭔가 큰일이 날 것 같다.


이 땅에서 태어나거나 이민을 오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개성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 하여간 뭔가 큰 개선 작업이 필요한 시기라고 느낀다.


폰 노이만이 태어나면 폰 노이만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유인구조와 지원체계를 갖춘 사회가 필요하다.


기껏 폰 노이만으로 태어났는데 피부과 의사를 하거나 궁핍한 집안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공부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사회라면, 이건 문제다.


[그간 과도한 업무로 인해 글을 자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책은 많이 읽었습니다. 전하고 싶은 책도 많습니다. 글로 풀어내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앞으로는 최대한 주기적으로 포스팅을 해볼 생각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