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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Mar 08. 2024

한국에는 연구자가 없다?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김경만

# 교수의 일이란?


수의 본업은 뭘까? 간단한 질문이고 답도 그렇다. 교수는 가르치고 연구한다. 교사는 교육에, 교수는 연구에 중점을 둔다.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탐구하고 비판한 후 새로운 지식으로 나아가는 연구 행위가 교수의 본업이다.


그런데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김경만 교수는 우리나라 사회과학은 이걸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그의 저서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고서도 방향감각이 없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대다수 교수들은 좋은 대학교 나오고 좋은 대학원의 박사학위 받았다. 훌륭한 스펙 소유자다. 그런데 저자는 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 사회과학계를 비판하는가?





# 안 한다니까, 연구 경쟁은


 * 박스 안은 인용구


내가 이해한 저자의 핵심 주장은 이거다.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더 이상 세계적 학자들과 연구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빠르게 변하는 국내의 정치이슈와 시사현안에 천착하고, 거기서 얻는 대중적 명성에 집착해온 우리의 사회과학자들은 글로벌 상징공간의 어떤 '이론적' 전통에도 속할 수 없는 미아가 되고 말았다


저자는 가혹하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회과학자들은 글로벌 연구경쟁에서 동떨어진 '미아'가 됐다고 말이다. 쎄다.


교수의 역량은 뭘까? 저자는 단언한다. 교수는 연구결과로 역량을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평가는 학문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동료 교수들이 한다.


즉, 저자에 따르면 교수의 본업이란 하루종일 공부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는 거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이론과 철학을 단련한 후 논문이나 저서를 저술하고 '학회지'로 대표되는 '학문 경쟁터'에서 다퉈야 한다. 그곳에서 다른 학자로부터 인정받아야 '학자다운 학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나라 사회과학계 이걸 권장하는 풍토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학문적 성과 대신, 교수가 국무총리, 장관, 대학 총장 등 대외적 지위가 교수의 능력으로 인정받는다고 비판한다.


결국 우리나라 사회과학계에서 세계적인 학자가 안 나온다. 한국에는 피에르 부르디외(사회학), 폴 쿠르그먼(경제학) 같은 대가도 없고 학맥도 없다. 그러니 학문을 하려면 미국에 가서 '배운 후' 학위를 따온다. 땅에서는 '배울 게' 없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를 돌이켜 봤다. 나는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철학 전공 수업을 난잡하게 들었다. 그런데 각 학문에서 한국인 학자가 확립한 이론을 접하지 못했다. 서구 학자들이 고안한 이론만 배웠다. 서양 학자 관점을 얼마나 잘 숙지했느냐가 실력을 결정했다.


저자는 '학문과 연구'를 존중하는 문화가 없는게 원인이라고 말한다. 일단 박사 학위만 따고 괜찮은 직장을 잡게 된다면, '글로벌 학문 경쟁터'에서 멀어진다는 거다.   


한 가지 비판이 더 나온다. 일부 학자가 말하는 '한국적 사회과학'이 대상이다. 일군의 학자들은 하버마스, 부르디외, 푸코 등 서양 대가들의 이론이 한국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며 우리 환경에 적합한 이론과 관점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가차없이 비판한다.


- 조한혜정, 강정인조차 강신표나 김경동, 한완상과 마찬가지로 서구이론은 우리 현실에 아무 적실성 없는 고도로 추상적인 지적 유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렇지만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처럼, 적실성을 논하려면 서구이론의 '담벼락' 앞에서 그들과 '유희'할 정도로 그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과연 한국의 사회학자들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말로 이들이 레비스트로스, 푸코, 알튀세르, 하버마스, 기든스, 부르디외의 이론을 잘 소화하고, 그래서 그 이론들이 한국에 적용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 이제 우리는 병적으로 집착해왔던 한국적인 그무엇을 -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지 못했음에도 - 찾아헤매는 "우회적이며 비생산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서구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 비판을 토대로 한 창의적인 이론을 무기로 글로벌 지식장에서 투쟁해야 한다.


논지는 간단하다. 사회학자들은 전통 거장의 이론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넘어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 독립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만의 갈라파고스 학문을 만드는데 이조차도 성과가 없다. 다시 '학문 경쟁터'에서 통용되는 문법으로 세계와 겨뤄야 한다는 거다.


용구에서 보듯, 저자는 사회학계의 주요 교수 거침없이 비판한다. 같은 학교의 동료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말한다. '이제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쟁터에서 세계와 겨룹시다.'


저자가 인용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례가 인상깊다. 현대 사회학의 대가 피에르 부르디외는 통계적 방법론을 사회학에 활용했다. 이론과 연역적 추론을 강조하는 프랑스 학자로서는 이례적이다. 그런데 그는 왜 그랬을까?


그는 미국을 넘으려고 했다. 미국 '학문 경쟁터'에서 사용되는 '계량적 방법론'을 적극 활용해서 사회학의 대가가 됐다. '프랑스식 사회과학'을 외치는 대신, 학문 경쟁터의 문법에 적응했고 영미권 사회학을 넘어섰다.




# 인상깊었다


굉장히 재밌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멋졌다. 한국 사회는 좁다. 그런데 '실명 비판'을 했다.


미국에서 공학 박사 학위 받고 한국에서 창한 CEO를 만났었다. 그 분이 그랬다. 한국 학계에서는 서로가 상처주기 않기 위해 조심한다고. 그래서 상호 평가가 냉정하지 못하다고. 미국과 문화가 다르다고 말이다.


사회과학계라고 예외는 아닐 거다. 그럼에도 그는 미움을 각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을 한다. 당한 근거도 제시한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세계적 인정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실력이 있기에 당당하다.


그리고 그걸 책에 녹여냈다. 저자는 후반부에서 자신의 연구를 되짚다. 어떤 과정을 거쳐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학위 취득 후 '학문 경쟁터'에서 외국의 일류 학자들과 어떻게 자웅을 겨루고 인정받아 왔는지 보여준다.


학문 후속세대 중 누군가는 저자의 회상을 보고 '한국 사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지 않을까. 저자는 한국 학자가 자신감 있게 '부르디외'를 비판하고 그게 동료 학자들의 인정을 받거나 로익 바캉 교수 같은 세계적인 학자와 당당히 논쟁하고 겨룰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삶을 살아가는 시각도 배웠다. 그는 연구가 피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학자이기에, 연구한다고 말한다. 기본에 충실한 직업윤리라고나 할까. 나는 나의 직업 윤리에 충실한가?


교수의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나는 저자와 시각을 달리한다. 배운 사람이 자신의 뜻을 펼치고, 그게 사회에 기여하면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연구자의 일이 학문 경쟁터에서의 성과 창출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도 이해한다. 교수는 연구자고 연구자는 '연구 경쟁터'에서 싸워야 한다는게 그의 기본 철학이다.


저자는 이 책을 미래 한국의 부르디외에게 바친다고 했다. 그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계를 가열차게 비판한 건 학문 후속세대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좋은 학위 받고 취하지 말아라. 계속 공부하고 싸워라. 한국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와 다퉈라. 그들을 이기고 인정받아라. 모두가 너의 이론을 공부하게 만들어라. 대가가 되어라. 가능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학계 비판과 저자의 연구 경로를 다룬다. 학문과 연구에 관심이 있거나 혹은 진행중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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