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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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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Oct 06. 2020

19. 황홀한 애착의 포르노

홍차와 장미의 나날

파파가 내게 남겨준 것들은 대부분 머릿속에서 존재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 p.217 - 모리 마리 



하레곁을 잠시 떠나 혼자 보내던 어느 일요일.

도서관에 갔다가 사노 요코가 극찬했던 모리 마리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이 2권이나 꽂혀 있기에 홀린듯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점심으로 집 앞 단골 중국집에 들러 백짬뽕을 포장해가기로 한다.


주문한 백짬뽕을 기다리는 동안 가게의 여주인이 테이블에 앉아서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와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

카운터에 서서 양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남자가 남편인 모양이다.

아빠는 손님이 없을 땐, 딸과 아내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잠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다.

아아, 부럽다,하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도 내가 '아직도 멀었어. 가야할 길이. 평생의 작업이다'라고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한 감정이다.


불과 며칠전에도 인스타그램에서 부모의 축복과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하는 누군가의 여동생을 보며 가슴이 아려오는 '질투'를 느꼈다.

음모, 이간질, 모략, 심리조종이 난무하지 않는 단순한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한 가족을 보면 나는 늘 심기가 뒤틀리곤 했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부모를 갖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행복한 사진'을 보며 내가 느꼈던 건 확실히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었다.

질투란 '내가 갖고 싶어하는 걸 알려주는 지뢰 탐지기'같은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그런 것조차 떠올리지도 못할만큼 질투에 눈이 멀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좋은 부모를 둔 사람들을 보면 질투를 느끼는구나'하고 알아차렸다.

항상 '내가 나의 좋은 부모가 되어주면 돼.', '내가 갖고 싶었던 부모를 생각해봐. 그리고 그 부모가 나에게 해줬으면 하는 일을 나에게 해주는거야.'라고 어차피 신포도일거라며 포기한 여우처럼 합리화하기 바빴는데, 이젠 그냥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자연스럽게 슬퍼하기로 한다. 

내가 갖지 못했던, 갖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건강하게 애도하기로 한다.

나는 지금 아프고 슬프다, 하고 인정하기로 한다.


이렇게 슬퍼할 줄 알게된 것은 나에겐 큰 발전이자, 성장이다.

이걸 인정할 수 없어서 그토록 '질투'라는 배배 꼬인 감정에 시달렸던 건 아닐까.

그리고는 '곱게 자라서 뭘 알겠느냐'고 비아냥거리며, 정서가 안정된 사람들을 멀리하고 내 주변 역시도 나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어딘지 뒤틀린 사람들로 가득 채우곤 했다.

이제 하레를 위해서라도 일단 나부터 제대로 슬퍼하고 정서가 안정되고 균형잡힌 사람이 되어야 해,라고 결심한다.


저 아이는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엄마, 아빠의 가게에 앉아서 사랑을 받으면서 점심을 먹고, 엄마, 아빠는 저 아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뒷바라지를 해주려고 애쓰겠지?

가족이 둘러앉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는 이 평범한 풍경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웠다.

그저 부모가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라고 말해주는 것이 내 어릴 적 가장 큰 소망이었다.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감당해야할 일들도.


경계선 성격장애를 가진 엄마가 내 정체성과 내면에 깊게 아로새겨 남긴 상처들을 '다 나았다.'고 착각하며 하던 '멀쩡한 척'을 이제 집어 치우기로 했다.

'아직도 멀었다', '평생의 작업이다'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지금 내가 더 알아야 할 건 없을까??하고 생각하게 됐다.

괜찮은 척하면서 '내가 말이야, 왕년에 말이야'라고 생각했으니...그게 불과 얼마 전인데도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그 일에서의 느낄 수 있는 교훈'에는 항상 시차가 생기는데, 이 '시차'를 최단으로 줄이는 것만 해도 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포장된 짬뽕이 나왔다.

오랜만에 먹는 이 집의 짬뽕은 여전히 맛있고, 밑반찬, 냅킨, 물티슈, 그리고 작은 물병까지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어서 감동했다.

이 가게는 잘될 수밖에 없네,라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모리 마리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기 시작했다.

얇은 수필집이라서 일요일 오후의 가벼운 독서거리로 완벽해 보였다.

사노 요코가 '호화로운 사람'이라고 했기에, 좀 나르시시스트같은 사람이 아닐까...생각했는데, 머릿말에서 옮긴이가 '정신적 귀족'이라고 묘사해서 더 호기심이 일었다.


세상에...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사노 요코가 이 책에 왜 그토록 환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거의 '포르노'다.

'부모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애착의 포르노'.

가슴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깊이 충족되지 못했던,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강렬한 본능이 꿈틀거리며 눈을 뜨고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애지중지 자란 귀한 아가씨.

아빠는 독일 유학을 다녀온 슈퍼 인텔리 의사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기도 하다.

모리 마리는 유년기에 피아노와 프랑스어에만 집중하면 됐고, 나머지는 하녀가 다 해주는 공주님으로 자란다.

결국 '이런 아이'를 감당하려면 '왕'에게 시집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고 결정한 부모는 중매를 통해 대상인의 집으로 시집을 보내고 그 집에서도 공주처럼 살다가 다 지겨워졌다며 제 발로 뛰쳐나온다.


하지만 그런 집안의 배경이나 부유함따위가 부러운 게 아니다. 

아빠가 마리를 얼마나 예뻐했던지, 마리가 16살때까지 무릎에 앉혔다고 한다.

마리가 오면 하던 일을 다 집어 치우고 "우리 마리는 눈도 최고, 코도 최고, 입도 최고, 머리카락도 검고 최고!"하면서 찬양을 했다고 한다.

유년기의 모리 마리


그렇다고 너무 애지중지해서 애를 '망친' 것도 아니다.

마리가 시집을 가자, 자신에게서 남편에게로 애정을 옮기려고 넘치는 애정을 애써 억누르기도 한다.

결혼한 남편이 1년간 파리로 간 기간동안 아빠에게 외로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배가 나는 계절에 감을 원해서는 안된다'라는 편지와 함께 애정이 가득 담긴 말린 꽃을 보내는 아빠.

아아, 이런 아빠에게서 '최고의 보물'로 사랑받는 기분이란, 도대체 어떤걸까?


그렇게 자란 사람의 내면세계는 과연 어떤 풍경인걸까?

'새하얀 바지와 셔츠'를 입고, '투구벌레같은 독일어'가 쓰인 책을 읽으며, '커다란 하얀 컵에 담긴 초콜릿을 좋아하던 아빠'라는 인물상을 추억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나로서는 외계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 만큼이나 상상하기가 어렵다.

나에게 엄마, 아빠란 늘 진저리, 진저리, 진저리, 온 힘을 다해 참아내야만 하는 것, 할수만 있다면 몰래 갖다 버리고 싶은 사람들었으니까.


분명 모리 마리의 아빠는 멋지긴 했지만 '완벽한'사람은 아니었다.

철저했지만 잘못된 위생관념으로 모든 음식을 '조리'해서 먹이기도 했다.

심지어 과일조차도 익혀 먹이는 바람에 마리와 형제들은 '비타민이 부족한 채로 성장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의 '인간적 한계'에 대해서조차 '그런 아버지의 귀족적 취향은 역시 우리 안에서 뭔가가 되어 성장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라고 모리 마리는 썼다.




"너의 황금 고갱이는 바로 여기 중심점에 있어." 엄마가 돌아누워서 내 심장에 손을 갖다 대며 갑자기 말했다. "느껴지니?"

나는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에게서 치약 냄새가 나고, 엄마의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간질였다.

"너의 중심점은 완벽해. 알겠니? 아무도 그걸 건드릴 수 없고, 너한테서 빼앗아 갈 수도 없어."
(중략)
"절대 잊지마." 엄마가 말했다. "알았지?"
(중략)
"황금처럼 찬란해." 엄마가 다시 말했다. 강하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맨 얼라이브 Man alive> p.142 - 토머스 페이지 맥비


말년의 모리 마리는 시모기타자와의 싱크대를 공용으로 써야 하는 다세대주택에 살면서 '침대 위에서' 요리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의 저작권 수입이 끊기자 먹고살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가난 속에서도 마리는 읽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글을 쓴다. 

침대 위에서 재료를 썰고, 공동주방에서 요리를 하면서도 '혀'가 기억하는 미식을 추구한다.

그야말로 '정신적인 귀족', 뼛속 깊이 몸에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 그녀는 '진정한 공주님'이었다.


시모기타자와 시절, 중년의 모리 마리


어린 시절 부유하게 살다가 갑자기 몰락한 사람들중에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인천공항같은곳을 떠돌며 자신이 여전히 부자라고 생각하며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맥도날드 할머니같이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 속에서 틀어박혀 사는 사람도.


모리 마리는 자신이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난하지만 현실속에서 그 가난조차 즐기며 삶을 부유하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뭘까?

타고난 기질?

주변 환경??


혹은 모리 마리의 묘사대로 '만사에 깨끗하게, 담채화 같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 담뿍 받았던 부모의 사랑이 탄탄한 자존감을 만들어주고 지탱해준 건 아닐까?

마치 어린 시절 엄마나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혀'가 기억하듯, 따뜻한 사랑의 기억이 마리라는 사람의 내면의 '황금단지'를 가득 채워, '바깥의 궁핍'따위 대수롭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무튼 정말이지 황홀한 독서였다.

풍요롭게 흘러 넘쳤던 아빠의 사랑을 회상하는 모리의 글을 읽는 것은.

사노 요코가 넋을 놓을만했어.

그리고 나도 넋을 놓고 그녀의 글 속으로 빠져 들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결코 진흙탕으로 만들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남들에게는 진짜 사금이 아니라 구리나 운모라 하더라도, 이 정신적 귀족은 틀림없이 공상의 세계에서 찬란한 금빛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리 마리를 부러워해야 할 진짜 이유다.

- 2018년 10월 <홍차와 장미의 나날> 옮긴이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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