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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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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Oct 22. 2020

26. 차라리 엄마가 괴물이었더라면 쉬웠을거야.

용서하고 떠나보내기

멜리에게는 엄마가 둘이다. 

(중략)

어느 때는 분홍 빛의 상냥한 엄마이고, 어느 때는 검은 빛의 악독한 엄마이다. 

(중략)

하지만 분홍 빛의 상냥한 엄마가 진짜 엄마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그러면 기분이 훨씬 좋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심술궂고 화를 잘 내는 검은 엄마를 동정한 적도 있다. 검은 엄마는 많이 울었고 불행했고 아팠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멜리는 그 엄마를 위로했다. 그 엄마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멜리는 분홍 엄마와 검은 엄마 사이에서 그렇게 살아갔다. 엄마가 기분이 좋을 때는 분명히 분홍 빛이다. 그러다가 심술쟁이 엄마로 변하면 검은 빛이 된다. 그럴 때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분홍 엄마가 다시 올 테니까.

<나쁜 엄마> p.7 - 클라라 비달




하레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길. 

몇 걸음 걷더니 곧 응석을 부리며 안아 달라고 한다.

영차~하고 들어 올리면 벌써 내 키의 반이 넘는다. 

그래도 아직 내 힘으로 이렇게 안고 다닐 수 있을 때, 많이 안아주고 싶다.


내 품에 안긴 하레가 내 입에 뽀뽀를 한다.

나는 립스틱이 하레에게 묻을까봐 입에 살짝 한 번, 그리고 양 볼에 뽀뽀를 해줬다.


하레가 내 얼굴에 코를 묻고 킁킁 거리더니, "고모 밴새.(냄새)"하고 말한다.

하레에게 '고모 밴새'란 어떤 의미이고,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파우더리한 머스크향을 싫어한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라고 하기엔 몸서리가 쳐지도록 싫어서 스스로도 늘 의아했을 정도로.


어느 날, 트라우마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알코올 의존증이 있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는 남들에게는 일상의 평범한 소리인 '병 따는 소리', '콸콸콸하고 액체를 컵에 따르는 소리'가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병을 따고 컵에 액체를 따르고 나면 엄마, 아빠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니까.


벨트 버클 푸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었다.

벨트가 풀리고 나면, 항상 잔인하게 폭행 당하곤 했던 무력한 어린 날의 기억이 자동 재생된다. 머릿속에서.

지금은 다 큰 어른인데도, 나약한 어린아이가 되서 다시 한 번 그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코티분 냄새였다.

엄마는 애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나를 가슴에 숨이 막히도록 꼭 끌어 안곤 했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곰인형을 꼭 끌어안듯이.

어렸지만 나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의 포옹이 마치 외로움과 슬픔을 잊어 보려는 듯한 절박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가슴에 코가 파묻혀 실제로도 숨이 막혔고, 엄마가 뿜어내는 절박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내가 놔달라고 버둥거리면 엄마는 바닥에 나를 팽개쳤다. 

그리곤 도끼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넌 참 냉정해!'라고 말했다.

그때 엄마에게 나던 냄새다.


복잡한 지하철 같은 데서 누군가의 가슴이 등에 닿을 때, 나는 소름이 돋는다.

단순히 낯선 타인의 몸이 닿았다는 불쾌감을 넘어 과각성 상태가 된다.

길을 걷다가도 진한 분홍색의 등산복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를 보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앞에 선 고라니처럼 얼어 붙었다.


문득 그게 다 '엄마'를 상기시키는 신호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울리던 벨소리만 들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내 몸은 '엄마'를 암시하는 신호가 나타날 때마다 '도망갈 준비'를 했다.




독재자들은 국민들이 자신의 존재를 늘 잊지 않도록 그리고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관공서와 집집마다 자신의 초상을 걸어 놓게 한다. 


어렸을 때, 거실 한 가운데에 걸려 있었던 엄마의 사진 한 장이 문득 떠올랐다.

30대 초반의 엄마가 아직 1살 정도의 아기인 동생(하레아빠)을 포대기에 꽁꽁 묶어서 업고 아빠의 짙은 회색 윈드 브레이커를 포대기 위에 두른 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상반신 위쪽으로 강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는 이 사진은 글쎄... 아름답다고 할만한 사진은 아니다.

아기는 햇살이 눈부신지 엄마 등에 업혀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엄마는 마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는 듯 활짝 웃고 있다.


엄마는 말 그대로 어디를 가든 -제주도든, 설악산이든, 지리산이든, 꽃구경이든- 분명 사시사철 달라지는 풍경을 감상하러 그곳까지 갔을텐데, 사진을 찍으면 항상 '자기'를 정중앙에 놓은 구도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의 구도, 배경을 찍는 법 같은 걸 여러 번이나 가르쳐줘도 소용이 없었다.


항상 자기가 한 가운데, 크게.

심지어 똑같은 스냅 사진들을 20장이고 30장이고 모아서 커다란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둔다.

형형색색의 꽃들 앞에서 그보다 더 휘황찬란한 빨간색, 진분홍색의 등산복을 입고.

배경은 채 20%도 되지 않고, 자기의 압도적인 존재로 화면 안을 가득 채우고 서 있다.


어쩌면 독재자들은 탄압과 무력으로 강탈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고 잊힐 것이 두려워 자신의 사진을 온 나라의 건물 안에 걸어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했던 건 아닐까? 




남존여비 사상이 매우 심한 작은 경상도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엄마는 딸 다섯을 내리 낳고서야 아들을 겨우 하나 낳고, 뒤이어 막내로 딸을 하나 더 낳은 집안의 셋째딸이다.

앞의 딸 다섯은 그저 아들을 낳기 전의 '실패작'에 불과했다.

그래서 엄마는 한평생 '다같은 자식'이지 딸,아들이 뭐가 다르냐며 외할머니를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아들을 낳기 위한 시도에서 실패한 결과물인 5명의 딸들 중 하나였던 엄마는 어려서부터 자기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집안일을 돕고 동생을 돌봤다고 했다.

산에서 자기 키보다 더 큰 나무짐을 초등학생 시절부터 해다 날라서 키가 안 컸다는 이야기는 유년기를 회상하는 엄마가 늘 꺼내는 레파토리다.


외아들인 삼촌에게 외갓집의 모든 지원이 집중되고 딸들은 투명 인간이었다.

엄마 바로 아래로 또 '딸'이 태어나자, 강보로 둘둘 감아 죽으라고 윗목으로 밀어두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이야기를 하던 엄마의 눈은 또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고 겁에 질려 있었다.

외아들인 삼촌이 망나니가 되어가는 동안 할아버지는 첫째, 둘째, 셋째 딸이 13살이 되자 외지의 파출부로 보내 버렸고, 넷째, 다섯째딸에게는 남동생을 기대하며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렇게 13살부터 남의 집에서 파출부를 하던 어린 소녀는 커서 꼭 자신만의 따스한 '가정'이 갖고 싶었다고 한다.

내 기억속의 외할아버지는 나에게는 조금 무뚝뚝해도 꽤 좋은 할아버지로 남아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할머니를 때리고 낫을 집어 던지며 부부 싸움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싸울 때, 너무 무서웠던 엄마는 나중에 자기는 아이들 앞에서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게 너허어어어무 싫어서(연극적톤) 나는 니들 앞에서 안싸우려고 노력했다. 나는...있잖아? 항상 꾸욱...참았어." 라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엄마가 아빠랑 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름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치고는 자기딴에는 잘하려고 노력을 하긴 했어 엄마는...하고 또 마음이 짠해졌다.

다시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 내리려고 하는 차에 정신이 또 번쩍 든다.


아니, 아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아빠도 성격이 참 독특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싸울 일은 별로 없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혼나거나 구박을 들었지.




경계선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흑과 백, 선과 악, 사랑과 증오만 존재한다. 그들에게 중간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잘 내는 사람의 입맛을 일일이 맞추려면 100% 완벽한 사람이 돼야 한다. 항상 유쾌한 기분으로 마치 갓 샤워를 마친 사람처럼 상대방의 소원을 언제든 들어줄 것처럼 대해야 한다. 

<내 옆에는 왜 이상한 사람이 많을까?> P.91 - 모니카 비트블룸, 산드라 뤼프케스 


아빠, 엄마, 나, 남동생.

신앙심도 깊고, 술은 커녕 담배도 안 피는 아빠, 헌신적인 엄마, 착한 딸, 개구쟁이 아들.

자기소개서의 클리셰같은 4인 가족.

그런 단란한 가족이라는 사진이 걸린 완벽한 액자를 내 손으로 부수고 뛰쳐 나왔을 때, "도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하고 그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울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이었다.


엄마가 골목대장 노릇을 하면서 한없이 권력을 맛보고 싶을 때는 졸개, 엄마의 성 생활, 자살 상담을 들어주고 우울함을 달래주는 카운슬러, 엄마의 엄마, 화받이, 부정적인 감정의 배설구, 쓰레기통, 귀찮은 일은 다 떠넘기는 심부름꾼, 든든한 보호자이자, 부모 말은 무조건 순종하는 착한 딸.

둘 중 한 명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천륜'으로 묶인 무시무시한 불공정 종신 계약이었다.


심지어 나는 이 계약에 '동의'한 적이 없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엄마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고, 경외하고, 감탄하고, 따르고, 존경하며, 감사하고 따를테니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낳아만 주세요."하고 부탁한 기억이 전혀 없다.


엄마가 마음대로 나를 낳자마자 "자! 내가 너를 낳고 키워줬으니, 나를 존경하고 숭배하고 감사하고 경탄해라."는 노예 계약이 나에게 주어졌다.

어디가서 호소할 때도 없다.

나는 이 부당한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나는 더이상 엄마의 '엄마'를 하고싶지 않다.

작고 귀여운 아이를 돌보고 길러내는 일도 충분히 벅차다.


하물며 사악하기까지 한 귀여운 척을 하는 늙은 아이,  불리할 땐 갑자기 '어른'으로 돌변해서 무적이 되는 여자를 감당하는 일은 나에게 늘 버거웠고, 솔직히 혐오감을 느낄때도 있었다.

그 혐오감을 나도 모르게 드러내면 엄마는 나를 '팽'하고 밀어내며 무섭게 화를 내고 나를 비난했다.

"너는 어쩜 그렇게 애가 냉정하니!"


'나는 불쌍하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고통스럽다. 나는 착하고, 여리고, 좋은 사람인데 늘 세상은 나를...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 나빠!'라는 분명한 흑백논리를 가진 사람 앞에서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엄마에게 진정한 애정을 느낄 수 없는 내가 혹시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싸이코패스 관련 책들을 찾아 읽어본 적도 있다.

'진짜 사이코패스라면, 본인이 사이코패스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라는 부분을 읽고 나서 매우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33살이 넘어서야 내가 엄마가 말한 것처럼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그저 엄마에게서 '독립'하여 한 사람의 개인이, 어른이 되어가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동에 대해서 부당하게 비난 받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조무래기, 엄마, 심부름꾼, 친구, 카운슬러로 노예처럼 머물러 있어야 할 내가 '감히' 독립을 시도한 죄로 온갖 비난을 들어야만 했고,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내면화해서 곧이곧대로 믿고, '나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야'라는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진 채 한평생을 살았다.

지나고보니 호구도 그런 호구가 없었는데 말이다.


엄마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내 안의 목소리는 늘 나에게 상기시켰다.

"넌 참 냉정해. 넌 진짜 이기적이야. 넌 진짜 나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내 인생을 물어내!!!"하고 엄마가 가진 모든 것을 향해 소송을 걸고 싶을 만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폭풍같은 시기가 지나고 나자 이번엔 '엄마는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내가 받은 모든 상처에 대해서 알 수도 없고, 자신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깨닫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번엔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안다'라고 생각했던, 그토록 단단했던 나의 세계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나는 한 없이 아래로 아래로 끝을 알 수도 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회한을 봤다. 그가 뿔과 꼬리가 달린 괴물이었다면 모든 게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The forgiveness project> p.214 - 마리나 칸타쿠지노


가슴 속에서 하레를 향해 퐁퐁 솟아나는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해줘야지, 하고 결심했던 날의 일이다.

처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듯한 어색함과 거부감 속에서 떠오르는 한 가지 기억이 있었다.

엄마에 대해 떠올릴 때면 늘 안 좋은 기억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정말로 '노력'하긴 했었구나, 싶었던 그런 기억.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TV에서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애정 표현을 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걸 봤던 모양이다.

나와 동생 앞에서 정말이지 몸둘바를 모르게 어색해 하면서 아빠와 서로 끌어안고 로봇같은 말투로 "여보, 사랑해요."하고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심하게 어색해서 당시에도 '자연스러운 애정'이라기 보다는 엄마, 아빠가 어쩐지 애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레에게 거의 '괴로움'에 가까운 느낌을 극복하면서까지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는 이런 마음을, 어쩌면 엄마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가혹한 애정 박탈과 실질적인 굶주림까지 겪었던 엄마는 나보다 더 '사랑받음'에 익숙하지 않았겠지.

엄마도 정말로 '마음'만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자기 자신이 조절이 잘 안되서 그렇지.


아름답고 기괴하고 매혹적이고 희한하고 불쌍하고 복잡한 나의 엄마.

엄마가 차라리 괴물 같은 여자였다면, 모든 게 참 쉬웠을텐데.

그냥 하레처럼 단순하게 엄마를 미워해도 됐을텐데.




용서란 열린 마음과 호기심으로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돌릴 때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이며, 다른 사람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습니다.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신념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해소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신체 감각을 그대로 느끼고 깊이 껴안아야 합니다. 이것이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삶이 괴롭냐고 심리학이 물었다 Suffering is optional> p.227 - 게일 브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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