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기억 한 자락은 불꽃처럼 펼쳐진다.
마당 가운데 걸린 커다란 무쇠솥에서 시뻘건 육개장이 펄펄 끓고 있다. 외숙모는 냉면 대접에
수육을 깔고 국물을 퍼 담는다. 제철 대파와 할머니가 봄철 뜯어말린 연한 고사리가 수육의
고추기름과 섞여 입맛을 돋운다. 가마솥 뚜껑에는 돼지비계로 기름을 두른 각종 전 들이
노릇하게 익어간다. 하얀 차양 아래 평상에는 사람들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고, 방에는
고스톱판이 펼쳐졌다. 밤이 깊지만, 사람들은 일어날 줄 모르고 마을 어귀부터 전해지는
웅성거림은 초겨울이 시작된 골목의 한기를 녹이고 있었다. 어린 나의 눈에 뵈진 그날의
외갓집 풍경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별세(別世)하셨다.“
평소 감기 한 번 앓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90세를 넘기고도 8년을 더 사셨다. 고질병 하나
없이 감기처럼 이틀을 누워계시다 딱 삼 일째 눈을 감으셨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든 15살,
중학교 2학년 초겨울이었다. 이 소식에 일가친척들은 큰외삼촌을 중심으로 외갓집 너른
마당으로 모였다. 각자의 할 일이 정해졌고, 일사불란하게 상례 준비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영정을 모신 별채에는 빠르게 빈소가 차려졌다. 소나무 향을 머금은 향이 향로에
피워져지자 냄새는 금세 방안을 넘어 마당까지 퍼졌다. 상주복을 입은 가족들은 먼저 빈소에
걸린 외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향해 절을 했다. 분위기는 엄숙했지만 슬프다기보다 평소
제사를 지내듯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올해로 연세가 어떻게 되셨지?" 조문을 마친 친척 어르신이 물었다.
"네 98세가 되셨지요" 삼촌이 엄숙히 대답했다.
"아이고, 천수를 다 사셨네. 자손들이 복 받았어.“
고개를 끄덕이던 어르신은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띠며 큰 소리로 말했다.
조문객들은 천수를 다하신 할아버지에게는 두 번의 깊은 절과 한 번의 반절을. 이어 상주들과
맞절을 한 후에는 다시 반절로 예의를 다했다. 그들의 위로는 슬픔보다 부러움에 가까웠다.
동네에서는 이를 '호상'이라 했다.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이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조문객들은 대화 중에도 큰 소리로 웃었고, 할머니에게 "이제
편하시겠네요"라는 농담까지 서슴지 않았다.
모든 이가 슬픔과는 무관하게 잔치에 온 듯했다. 슬픔보다 감사와 웃음을 찾으려는 '호상'의
개념은 병원 장례식장이 표준화된 애도 속에서 점차 잊혀 가던 우리 고유의 정서였다.
가족과 가까운 이들만의 애도가 조용히 치러지는 것이 익숙했지만, 외갓집만큼은 달랐다.
넓은 마당을 가진 한옥은 큰 행사를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혼례부터 회갑 잔치,
상례까지 집안의 모든 대소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외삼촌을 비롯한 외가 식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단 설치부터 상차림까지 한, 두 시간 안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삼베로 만들어진 상복에 두건을 쓰고, 짚신까지 준비했다. 외할머니가 윤달에 준비했던
곱디고운 외할아버지의 명주수의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큰외삼촌을 중심으로 툇마루까지
늘어선 상주들의 모습은 대가족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적 풍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할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장정들이 모이니까 든든하구먼!" 사람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외사촌들의 당당한 체격이 조문객들의 부러움을 샀다. 외갓집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돈 주고도 살 수 없던 우월한 유전자의 결과였다. 한 대를 건너 나타난
다는 속설이 무색하게 친손자를 비롯해 증손자까지 대를 이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마당에서
끓고있는 음식과 사람들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겨울 온도가 3~4도쯤 높아진 것 같았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이고오!“
조문객이 마당으로 들어서면 곡성이 울려 퍼졌다. 4음절의 그 소리는 돌아가신 망자가
당장이라도 관을 뚫고 뛰어나올 정도로 애달프고 구슬펐다. 하지만 우는 이는 자식이 아니라
'국비'였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 잊힌 돈을 받고 곡을 해주는 특별한 여인이었다. 화려한
상례에 어울리는 경건하고 장엄한 장례식을 만들고 싶었던 큰 외삼촌은 곡성으로 자신의
마지막 효를 다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곡소리를 해!"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거렸지만 몰래 눈물을 훔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애절한 소리는 대문을 들어서는 조문객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로 인해, 빈소는 더욱 경건했다. 하지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면 이내 큰 소리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할아버지를 추억했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하얀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장신이셨다. 가지런히 빗어 넘긴
은발까지. 천생 부잣집 도련님 같은 풍모였다. 게다가 부지런한 성품으로 농번기면
이곳저곳을 다니셨고,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내가 할아버지를 찾기라도 하면
"저 옆에 고추밭에 계신다!" 동네 어른들이 먼저 알려주셨다.
조문객들은 할아버지의 생전 이야기를 나누며 삶을 추억했다.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았다.
극진히 모셨던 증조할머니에겐 효자 아들이었지만, 사람들에겐 까다롭고 고집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끈질긴 투지와 인내심으로 그 많은 농사를 짓고, 동네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얘기들.
면사무소가 할아버지 땅 일부에 지어져 20년간 임대하며, 승진한 둘째 외삼촌 얘기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 할아버지는 여전히 저 안방에 살아계셨다.
"둘째 손자가 눈에 밟혀 어떻게 눈을 감으셨나 그래!"한 노인이 제 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고 참 그 둘째 손주는 어떻게 됐어?" 건너편에 있던 다른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상주들 속, 허리가 구부러진 둘째
오빠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둘째 오빠를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 속에는
씻지 못할 죄책감이 숨어 있었다.
첫 손자가 태어나고 2년 후, 둘째가 태어났다. 흰 피부와 큼직한 이목구비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감기라도 걸릴세라 몸에 좋은 보약과 제철 한약을 지어 먹였다. 그러던 중,
양의원으로 가야 할 장티푸스를 한의원에서 침으로 해결했다. 별 탈이 없이 넘어가는 듯했던
오빠는 자주 아프더니 말이 어눌해졌고, 허리가 굽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걸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 또한 그 죄책감을 평생의 숙제로 안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평생 둘째 손자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이어진 깊은 인연이었다. 집 한 채와 넓은 땅을 남겨주신 것은, 단순히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그 모든 아픔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할아버지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사흘째 아침, 일찍부터 부엌과 사랑방이 부산했다. 새벽부터 방문한 상여꾼들은 초겨울의 찬
기운을 뜨거운 육개장으로 달랜 후 발인을 준비했다. 마당 한 구석에 할아버지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탈 꽃상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방색 단청과 대비된 흰색의 커다란 조화들이
송이송이 매달렸다. 상례를 준비한 마을 이장님은 수많은 죽음을 산으로 실어 날랐을 상여에
아이 머리만 한 흰색의 조화를 군데군데 조금 더 채워 넣었다. 큰외삼촌이 사촌오빠들과
준비했던 천 원짜리 지폐는 상여꾼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금액이 어느 정도에
다다르고 앞장선 상여꾼이 명령을 내려야 상여가 움직였다.
드디어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곡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구슬프고 애절한 소리에 눈물이
났다. 큰 소리로 호호 웃던 엄마도 그제야 "아이고, 아이고" 곡을 시작했다.
마을 어귀의 커다란 은행나무는 상여 행렬이 있을 때마다 노제를 지내던 곳이다. 할아버지도
농사일을 마친 저녁이면 그 나무 아래 평상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평소에는 외손녀를
예뻐하진 않으셨지만, 그 은행나무 아래서 빨갛게 잘 익은 수박씨를 발라주신 기억이 있었다.
고스톱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달리, 동네 사람들과 내기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가 그때 만큼은
멋있어 보였었다. 외할아버지의 상여 행렬이 은행나무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렇게 고귀하던 양반도 저리 가는구먼"
"여한이 없겠어. 자손들 잘되고, 재산도 그리 남겨주었는데."
"100살은 넘기실 줄 알았는데.“
노제를 지내는 동안, 구경나온 동네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흉인지 찬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들을 내뱉기도 했다. 이들의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98년을 건강하게 살다 간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슬프고 아픈 비극이 아니라 완성된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어린 나의 눈에 뵈진 그날의 할아버지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든든히
살아낸 마을 사람들의 진정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호상’이란 단순히 장수한 이의 죽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이 완성되었음을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슬픔보다 감사와 웃음이 더 어울리는 자리였다. 육개장과 막걸리,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나누는 이야기들. 이 모든 것이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정서였다. 할아버지의 상례는 생의 마지막조차도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숭고함이며, 삶과 죽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었다. 나 역시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속에서도 감사와 사랑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