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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Mar 09. 2021

별일 없이 산다

2021.03.07 음식일기


"밥 먹었어?"


이렇게 식사 여부를 묻는 말이 인사가 되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


"응. 먹었어. 너는?"


여기서 대답은 꼭 사실일 필요도 없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헤어질 때조차 우리는 상대방의 식사를 챙긴다.


진심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예의를 지킴으로서 얻게 되는 마음 같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


음식 일기를 써서 공유하는 것 역시 그런 마음이 담겨 있다.


저 별일 없이 잘 살고 있어요.

별다른 일 없이 즐겁게 지냅니다.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2021.3.7 아침


오전 10시. 바나나 한 개와 용과 한 개


- 클래식 음악과 함께 외국의 풍경을 보여주는 유튜브 채널을 틀어놓고, 그 앞에 상을 폈다. 바나나와 용과를 먹으며 이태리의 자연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산 열대과일과 이탈리아 설산의 조합이라. 아이러니하군.'

그래서 상상해보았다. 과거 식인을 하던 사람들은 식인 행위를 통해 피식자의 힘과 기억을 얻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면 과일에도 과일의 기억이 있어 우리가 그것을 먹는 것만으로도 그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용과를 먹음으로써 베트남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면? 용과의 맛과 베트남의 전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청각 역시 베트남의 소리로 가득 차고 말이다.

다만, 고기를 먹을 때 그 동물의 생전 경험이 전이된다면 그럼에도 우리는 육식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평생을 좁은 우리에서 갇혀 지내다 단 한 번 도축당할 때만 세상 빛을 보게 되는 가축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된다면 우리는 육식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점심에 먹을 고기를 굽는 나는 참 모순적이다.



2021.3.7. 점심


오후 1시. 오리구이와 대패삼겹살. 밥과 모둠 쌈


- 혼자 살 때도 그랬지만 주말에만 함께 식사를 하는 2인 가정에서 야채나 과일 같은 신선식품을 구매하기란 망설여질 때가 많다. 가끔은 먹는 것보다 버리게 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소량으로 판매하는 과일 세트나 모둠 야채를 사게 된다.

덕분에 오늘은 쌈밥집에서나 먹던 케일을 집에서 먹게 되었다. 그런데 케일을 씻어 본 적이 있는가? 물방울이 형태 그대로 케일 잎 위를 또르르 흘러간다. 물줄기가 조금도 케일을 적시지 못하는 것 같다. 아! 케일은 방수구나! 자연 속에 떨어진다면 케일 잎으로 우산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21.3.7. 간식


오후 3시/ 오후 5시. 오렌지 1개/ 오렌지 반 개


- 중학생 때 친구가 오렌지를 까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전까지 나는 오렌지를 딱딱한 귤쯤으로 생각하고 손톱이 누레지게 힘으로 껍질을 까곤 했다. 그런데 친구는 커터칼을 이용해서 오렌지의 윗동과 아랫동을 잘라내고 칼집을 내어 손쉽게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었다. 줄줄 흘러나오는 오렌지 즙을 따라 손바닥을 핥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세련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날 왠지 분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는 오렌지 까는 방법도 안 가르쳐주고 뭐했어?"


일회용 커터칼을 챙기던 친구 앞에서 손톱을 오렌지 속에 푹 쑤셔 넣던 부끄러운 기억은 살면서 몇 번 더 반복되었다. 돈가스를 받자마자 한 번에 잘랐던 나와는 달리 먹을 때마다 조금씩 썰어서 입에 넣던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처음으로 간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폭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 나이프 든 손만 어색하게 허공을 맴돌 때 나는 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것에 익숙하고 노련해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거 한 두 번 해보면 이내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오렌지 껍질을 쉽게 벗기는 법, 스테이크를 능숙하게 써는 법. 그런 건 경험이 쌓이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처음이라고, 어색하다고 주눅 들 필요 없다. 두 번, 세 번 해 본 사람이 조금 알려주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지금 얼마나 깔끔하게 오렌지를 먹고 있는가.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난다.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무인 자동화 기계 사용법을 몰라 빈손으로 돌아오셨다는 할머니. 다음번엔 내가 꼭 사용법을 알려드려야겠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꼭 알려드려야지.



2021.3.7 저녁


오후 7시. 간자장과 탕수육


- 이건 먹지 말았어야 했다.




2021.3.7. 음식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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