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을 떠나 영등포에 머문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다이내믹한 이유로 3개월 동안 잠시 머물 곳이 필요했고, 회사와 가까운 영등포가 당첨된 것이다. 주말 드라마 급의 이사 스토리는 다음에 풀어내기로 하고, 일단 열흘 만에 구한 3개월 단기 오피스텔은 가격에 비례하는 높은 만족감을 주고 있다.
2층이었지만 반지하 같았던 예전 집과 달리 지금은 벽 한 면을 차지하는 큰 창문으로 해가 쏟아지고, 밤에는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으며, 깨끗한 욕실과 잘 갖춰진 빌트인 가구들이 ‘나 좀 브이로그처럼 살고 있네?’라는 뿌듯함을 주고 있다. 물론 커튼이 없어서 새벽에 강제로 기상하고 있고, 왜 다들 복층에 사는 것을 말렸는지 이제는 깨달았지만 익숙함은 무서운 것이어서 지금은 불평 없이 머물고 있다. 하지만 2개월 뒤에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물러야 한다. 괜히 3개월 동안 눈만 높아지는 것 아닌가 싶다.
“나 3개월 후에 다시 망원으로 올 거야!!”
망원을 떠나기 전 수차례 있었던 술 모임에서 나는 이렇게 외치곤 했다. 그만큼 5년 동안 머문 망원은 나에게 특별한 동네였다. 익숙한 거리와 풍경, 나만 아는 맛집과 술집, 원앤온리 망원시장, 켜켜이 쌓아온 동네 인연까지 5년 동안 망원을 잘 누리고 살았다고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망원이 주는 특별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망원을 주제로 한 에세이들이 꾸준히 나오고(그만큼 팔리니까 나오겠지), 관련 브이로그도 많고(구독자 높음), 망원 산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도 있었다(이건 내 착각일 수도).
그런 이유로 마치 오랜 남자친구와 잠시 이별하고 부모님이 정해준 정혼자와 강제로 결혼해서 “내 진짜 사랑은 망원 너야, 영등포랑은 3개월 뒤에 이혼하고 다시 돌아올게. 기다려줘!”라고 외치는 것 같은 마음을 가졌었다. 누가 들으면 비웃겠지만 나는 진지하게 망원에 대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영등포에는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 심정은? 어라, 낯설고 험악해 보였던 정혼자가 생각보다 부드럽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 마음이랄까. 웃겨 정말. 나에게 지조 따위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트를 가려고 해도 지도 어플을 켜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예전이라면 최적의 골목을 찾아서 갈 수 있는 마트를 허접하게 지도를 써서 가야 하다니! 짜증이 났지만 어느새 이 귀찮은 과정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르는 골목을 찾아가고,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고, 내가 모르는 곳이 아는 곳으로 바뀌는 재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재미였다.
회사와 가까운 거리도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했다. 물론 여의도에서 망원은 먼 거리라 할 수 없지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걷는 3단계 과정이 무척 번거로웠다. 그리고 여의도의 퇴근길은 정말 적응이 되지 않더라.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최후의 탈출선을 타는 것처럼 버스에 오르고, 오로지 ‘퇴근’이라는 명령값을 수행하는 게임 NPC가 되어 집에 가는 길이 참 재미 없었다. 지금은 웬만하면 퇴근하고 집까지 걸어가고 있다. 30~40분 정도 걸리는데 걸으면서 여의도 공원 풍경도 보고, 노브랜드 스토어에서 생필품도 쇼핑하고, 설렁설렁 저녁 공기를 맞는다. 업무 시간 내내 머리에 꽁꽁 들어있던 업무들이 걸으면서 흩어지는 기분이라 좋다.
하지만 영등포에 빠진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다. 동서남북 산책코스를 바꿔가며 걷다가 엄청난 규모의 구립 스포츠센터를 발견했다. 예전에 다녔던 마포구센터가 동네 슈퍼라면, 이곳은 스타필드다. 찾아보니 수영, 탁구, 필라테스, 발레, 댄스 등등 웬만한 운동 수업이 다 있는 곳이었다. 신규 회원 등록일을 파악한 후 화목은 수영, 월수금은 스피닝을 등록해 보았다. 물론 월화수목금 운동을 갈 정도로 미쳐있진 않다. 그랬다면 내 몸뚱이가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겠지. 약속이 있는 날은 얼마든지 수업을 빠져도 될 만큼의 매력적인 수강료 때문이었다. 두 수업의 한 달 등록비는 8만 7천 원이었다. 개당이 아니라 두 개 합친 가격! 대규모의 샤워 시설까지 갖춰진 곳이 이 가격이라니.
아마도 나는 망원과 헤어질 결심을 이때 한 것 같다. 6월 2일부터 수업이 시작되었고, 2주가 지난 지금 나는 망원에 이별을 통보했다. 단단히 반해버린 나는 오래도록 체육센터 옆에 붙어살면서 이곳의 모든 운동을 해보고 싶어졌다.
“나 그냥 지금 사는 영등포에 집 구해보려고.”
어제 만난 C와 L에게 나의 이 다짐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매번 계획이 세워지면 동네방네 알려야 속이 시원한 나에게 그녀들은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어이없어 하는 것 같았다.
“언제는 망원 다시 간다고 난리난리 치더니~”
하도 입을 털고, 바꾸는 일이 많다 보니 일말의 부끄러움도 사라진 듯하다. 이 변덕이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영등포에 머무르며 새로운 재미를 찾아가려 한다.
지조가 별 건가. ‘지’금 ‘좋’으면 그만이지 뭐.
2022.6.12.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