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승민 Nov 22. 2021

질풍노도의 시기는 왜 무서울까

일본의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보다보면 아이들이 무서워집니다. 범인이 아이일 때가 많아서입니다(스포일러일까요?). 거기 나오는 미성년 범인들은 굉장히 순수하면서도 잔인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도덕적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에 청소년의 이지메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고민, 여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법 체계에 대한 회의, 아이라고 선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반전의 통찰 같은 것들이 비춰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더 깊이 있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아이들, 특히 우리가 청소년이라 부르는 시기의 세대에 대한 고민은 히가시노 게이고나 일본만의 것은 아닐 겁니다. 당장 우리도 학교폭력이나 왕따가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대두된 지 오래입니다. 심각한 사회문제를 떠나 당장 중2병 같은 것이 부모의 가장 큰 골칫거리죠. 


그렇다면 애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일본의 한 탐사보도 기자가 이지메를 추적하고 분석해 쓴 <이지메의 구조>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은 이지메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지메의 가해자는 '불완전'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폭력으로 형상화하는 '전능감'으로 이 분노를 해소하려고 한다. 특히 다른 자아를 가진 타인을 조종함으로써 전능감을 극대화한다."


쉽게 말해, 일단 애들은 항상 화가 나 있습니다. 어벤저스의 헐크 같죠. 이 화를 푸는 방법은 '내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계를 조작하거나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는 것들은 '내 맘대로 하는 것'에서 느끼는 쾌감이 적습니다. 원래 그렇게 돼야 하는 것들이니까요. 


그럼 진짜 내맘대로 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게 뭘까요. 원래는 그렇게 할 수 없고 그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 바로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조종하는 일입니다(때로는 비슷한 이유로 동물이 폭력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잠깐. 그 전에 대체 애들 왜 화가 나있는 걸까요. 사실 <이지메의 구조>에서는 분노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빈약한 편입니다. 자라나는 시기이다 보니 정서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식이죠. 


그래서 다른 데서 단서를 찾아볼까 합니다. 영국의 청소년이 어떻게 정치성 성향을 학습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하나 있는데요(그들도 청소년에 대한 고민이 많습디다). 그 서두에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10대는 아주 민감하게 자신들이 살아야 할 세상과 지금의 틀이 맞지 않는 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그에 비해 주어지는 권한은 적다. 이에 능동감 결핍이 강해지고 전능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사실 앞서 <이지메의 구조>에서도 전능감으로 분노를 해소한다고 했죠. 답은 이미 거기서 나온걸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전능감입니다. 하고싶은 게 있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 못하는 분노가 쌓여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지메가 학교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더해서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지메의 공간에는 보편적 질서와 다른 '지금 여기'만의 소집단 질서가 있다. 이지메가 유아적이면서도 동시에 치밀하고 어른스러운 이유다. 소집단 질서는 기생충처럼 개인 내부로 침투해 개인으로 하여금 보편적 질서와 다른 행동을 가능하게끔 한다. 여기서 엄격한 신분구조도 생긴다."


앞서 제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도덕적 거리낌 없다'고 표현한 것 기억하시나요? 실제로 아이들의 집단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사회의 일반적인 규범과 유리시키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능동 욕구를 발현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학교에는 전능감의 결핍을 느끼는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습니다. 그렇게 결핍끼리 부대끼다가 자기들만의 질서를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방식이 있어"라고 외치는 거죠. 그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기고 또 어떤 이들은 방조가가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무리 안에서는 그들만의 질서가 통용됩니다. 이때 외부, 즉 어른의 질서는 외부의 간섭이고 혹시 어른들의 질서로 판단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누군가는 외세를 끌여들여 내정간섭을 일으키는 반역자나 다름없죠.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의 전능감 결핍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죠. 교육을 통해 사회화를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어른의 판단과 규범 아래 아이가 움직여야 합니다. 


여기에 현대적 변수도 생깁니다. 신체적/사회적 성장과 인식/문화와의 시차가 발생한 겁니다. 아이들은 옛날보다 빨리 큽니다.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은 아이가 더 빨리 독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돌보는 어른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온다는 겁니다. 아이가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는 이유가 줄어들고 그만큼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욕구도 더 빨리 더 강하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어온 문화와 어른들의 인식 속에서 그들은 아직 애일 뿐이고, 아직 속박당해야 할 것들이 많고, 스스로를 판단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결핍의 기간은 길어지고 정도는 강해지면서 지금 같은 문제가 나타나는 셈이죠. 


더구나 여기에 학교라는 시스템도 영향을 미칩니다. 학교는 과거에 비해 개개인의 관계가 과밀화돼 있습니다. 단순히 학급당 학생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학생의 일상 전반에 개입하면서 소수의 구성원 사이에 공생을 강요합니다. 여기서 개인은 '사이좋게 지내지 않아도 될 권리'와 선택권이 없습니다. 친구들과의 평화를 강요당하기 때문이죠. 또 학교가 성역화 돼있어 보편적 질서와 별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여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일을 별도의 도덕적/법적 잣대로 판단하려 합니다. 이런 경향을 아이들도 받아들이고 있을테니, 이로 인해 괴롭힐 이유가 자의적으로 생성되는 게 용납되고 개인은 여기에 순응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경향이 게 됩니다. 


복잡하게 내려왔지만 결국 결론은 이겁니다. 애들은 원래 화가 나있다. 다 컸는데 맘대로 하질 못해서.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해 전능감을 느끼려 한다. 


가만보니...MZ세대와 꼰대와의 간극도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s://brunch.co.kr/@hamquixote/43

작가의 이전글 누구를 위한 공청회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