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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승민 May 29. 2020

아버지와 삼촌. 당신들이 부럽습니다

아버지와 삼촌. 당신들이 부럽습니다. 서로 싸우는 모습 뒤에 당당함과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산업화, 삼촌은 민주화를 해내셨습니다. 역사에 남을 유산 덕인지 당신들의 싸우는 모습에도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제 저희도 저희가 남길 저희만의 유산을 갖고 싶습니다. 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요? 아이러니하게도 당신들의 그 유산이 저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아버지 말씀처럼 저희는 패기가 없습니다. 중소기업은 쳐다도 안보고 힘든일은 하기 싫어합니다. 돈 무서운 줄 모르고 근검절약 없이 빚을 집니다. 


하지만 아버지, 그건 당신이 이룩한 산업화의 흔적입니다. 돈에 대한 당신의 선망과 시선이 제가 대기업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솔직히 당신도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다니는 사위 며느리 원하시잖아요. 그래서인지 당신의 자식들도 저를 안 만나줍니다.


당신도 밑바닥부터 시작하셨다고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타던 사다리가 저희에겐 없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면 밑바닥에서 끝납니다. 월세로 시작하면 평생 월세죠. 당신의 집값도 사실 제 빚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빚만 갚다보니 전 티끌 모아 티끌입니다.


삼촌. 저희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요?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으려면 청년답게 지식으로 무장해 분연히 들고 일어서야 한다고요? 네 사실 저희는 당신과 달리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은 물론 시장, 시의원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책도 안 읽고 뉴스는 연예 뉴스만 봅니다. 당신들처럼 책상 앞에 '내 꿈은 대통령'이라고 쓰지 못하고 9급 공무원이 되면 축하파티를 엽니다. 


그러나 이건 당신이 만들다 만 절름발이 민주주의의 흔적입니다. 목소리를 내다가도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쏙 들어간 당신, 그러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푸념만 하다가 주인공이 된듯한 지금에선 다시 예전의 활동가로 돌아선듯한 모습을 보며 저희는 정치에 대한 허무감과 불신만 키웠습니다. 당신들이 일자리를 골라가며 등한시한 사이, 저희는 몇 안되는 자리를 두고 코피를 흘리는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당신들 공을 폄하하자는 게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압니다. 당신들 덕분에 굶주리지 않고, 권리를 지키며 인간답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국제시장>, <변호인>을 보면서 눈물 흘렸습니다.


거부하는 건 당신들의 과거 유산이 아닙니다. 서로의 유산을 대하는 지금의 태도입니다. <국제시장>이나 <변호인>을 보지도 않고 싫어하는 당신들 모습입니다. 자신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신 두분은 서로의 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방식을 탓 하다가 그걸 낳은 생각을 문제 삼더니, 이제는 그냥 존재 자체가 사악해서 그런거라고 헐뜯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증명해줄 저한테 같은 길을 가라고 서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니 했습니다. 이것도 과정이려니 했죠. 그런데 이젠 지긋지긋해진 제가 들은척도 안하자 저와 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붙잡고 자신이 틀린게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고 계시네요.


자랑스러운 걸 알아야 한다고요? 부끄러운 것도 알아야 한다고요? 저희에게 필요한건 그냥 팩트입니다. 그 사실이 부끄러운 건지 자랑스러운 건지 판단은 당신들이 아니라 저와 제 아이가 합니다. 당신들 생각처럼 저희는 써있거나 가르쳐준대로만 아는 바보가 아닙니다.


제가 갈 길, 제가 남길 유산도 그렇습니다. 아직은 어떤 걸 만들지 모르지만, 분명한건 당신들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는 점입니다. 시대가 다르니까요. 심지어 당신들과 같은 기성세대와 함께 산다는 자체도 당신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까. 해결해야 할 문제도 다르니 당신들과 답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압니다. 걱정이 되시겠죠.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겠죠. 혹시 힘든 길을 갈까 걱정일 겁니다. 하지만 과거를 보세요. 누군가 지시하거나 길을 가르쳐줘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셨나요? 아닐 겁니다.


저희도 저희 시대를 설명하는 게 '미생'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다만 저희도 당신들처럼 자연스럽게 저희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러다 저희만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시대가 요구하는 저희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그게 완벽한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산업화도 민주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래도 그렇게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 내면 스스로에게, 그리고 제 아이에게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존경하는 당신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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