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사 김태형 에세이《나는 네Nez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많고, 주어진 삶에는 한계가 있기에 타인에 대한 호기심을 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책 한 권을 펴고 책장을 넘기며 나는 그 사람이 된다. 때로 그는 경찰이고, 선생님이고, 방송 작가이며, 장의사이기도 하다. 수많은 에세이 중에 직업적 특성을 담뿍 담은 책이 있으면 주저 않고 펼친다. 이번엔 조향사다. 향을 만들어 내는 직업. 코의 감각에 의지해 삶을 꾸려가는 사람의 문장은 어떨까, 그의 삶은 어떨까 궁금했다.
직업적 세계는 감히 상상할 수없이 넓고 다양해서 죽기 전까지 그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 직업의 세계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스스로를 ‘향쟁이’라고 칭하곤 하는데, 그 말이 익숙해 한참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글쟁이’가 될 거예요."하고 부모님께 선언했던 때가 떠올랐다. 입속에 감돌던 묵직하면서도 단호하며 설렘을 잔뜩 묻힌 향이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우리가 쉬이 알지 못하는 향의 세계로 큰 틀을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내부는 ‘네Nez’가 되길 꿈꾸는 청년의 열정과, 낯설고 외로운 유학 생활에서의 고단함,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윽한 단상이 채운다. 그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타인의 것이 아닌 내 것처럼 느껴진다. 그 어떤 장르의 글들보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까닭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인데, 마치 내 것 같이 느끼게 하는 힘. 그 감각이 바로 공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제 막 조향사가 되어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고, 자신의 향을 대중에게 선보이려는 사람이다. 소설가인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가 향을 맡지 못하는 아노스미인 지독한 아이러니를 히스토리로 가진 사람이다.
… 내가 향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우선 어머니부터 매우 당혹해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노스미Anosmie, 즉 후각 상실증을 앓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랬던 아이가 코를 놀려 밥벌이를 해야 하는 조향사가 되겠다고 하니 얼마나 얄미운 청개구리 같았을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꿈의 진정한 매력은 미치광이로 보일지언정 역경과 편견을 뛰어넘고 이루어낸 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값진 성취감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나는 “아버지가 아노스미인 조향사라니, 이 얼마나 멋진 아이러니인가!”하며 흥분하기까지 하였다.
김태형, 《나는 네Nez입니다》, 난다, 2020.07. p.41-42
책 구석구석엔 그가 소설가인 어머니의 바람에서 멀어지려 했던 노력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문장에서는 숨기지 못한 예술적 재능이 묻어났다.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음표들을 춤추게 하고, 화가가 수백 가지의 색으로 또다른 세계를 그려내며, 작가가 종이 위 단어들에 생명을 불어넣듯, 조향사는 아름다운 향료를 구사하여 향수에 자신의 이야기를 채우고 감성을 입힌다. 나의 예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향수는 시향하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또다른 경험과 감정을 이끌어낸다. 조향사가 담은 이야기에 공감하여 자신의 추억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토닥여주는 향기에 슬픔을 맡기며 자신을 추스르기도 한다. 이런 상호작용을 모두 포함한 예술이 바로 향이다.
김태형, 《나는 네Nez입니다》, 난다, 2020.07. p.16-17
이 책의 매력은 글의 소재가 단순히 ‘조향사’와 ‘향수’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향에 대한 애정을 베이스로 꿈을 향해 달리는 청년의 열정과 좌절, 유학생의 외로움과 그리움, 새로운 일을 꾸려나가는 이의 고뇌와 욕심,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은은한 그리움과 따스함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단조로운 어느 한 가지 향만을 가진 향수는 없다. 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향수는 첫 향과 중간 향, 오래도록 남는 잔향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다고 들었다. 이 책은 향수와 닮았다. 내게 이 책의 첫 향은 꿈에 대한 열기와 불안이었고, 중간 향은 향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었으며, 잔향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냄새였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조향사의 예술인 ‘향’을 꾸려나간다.
책과 함께 받은 세 종류의 향수 샘플은 책을 다 읽기 전까지 개봉하지 않고 아껴두었다. 총 세 차례에 걸쳐 책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길을 오가며 틈이 나는 대로 꺼내 읽었고, 두 번째에는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으며 세 번째로는 밑줄 그은 문장을 워드로 옮겨 적으면서 빠르게 훑어 내렸다.
아껴두었던 향수 샘플은 두 번째 정독 과정에서 꺼내었는데, 책의 1부 끝 즈음에 각 향수에 대한 에세이가 연속적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향지나 내 몸 어딘가가 아닌 책의 페이지에 그 향수를 처음 뿌렸다. 향을 담은 글이 있는 페이지를 펼 때 그 향이 나면,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 그 페이지 즈음에 가면 그가 만든 향기가 난다. 막연한 이국의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에 향이 더해져 더 풍부한 감각으로 그려졌다. 이제 이 향을 맡으면 자연스레 이 책과 그 거리가 그려지지 않을까.
후각은 매우 중요하지만 은연중 우리가 당연시하여 잊고 있는 공기와 같은 감각이다. 후각은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뇌를 컴퓨터라고 하고 수많은 기억을 암호가 걸린 파일들이라고 할 때, 후각은 비밀번호가 빼곡이 적힌 암호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김태형, 《나는 네Nez입니다》, 난다, 2020.07. p.43
이 책은 다수의 사람이 평생 체험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공감의 지점이 그만큼 협소할 것이란 예측을 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람’과 그의 삶에 대한 글이기에 낯설지 않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서 익숙한 감각을, 친숙한 향기를 느끼며 빠져들고 싶다면 김태형 조향사의 향기가 어린 《나는 네Nez입니다》를 펼치길 권한다.
우리는 왜 향을 사랑하는가. 향기가 우리를 사랑하기에, 또 우리를 위로하기에 나 역시 그 향기란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내 이런 고백 속 그 거리의 향기가 어느 날 당신에게 역시 담담한 위로의 향기로 전해졌으면 한다.
김태형, 《나는 네 Nez입니다》, 난다, 2020.07. p.120
세 번째로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해 읽은 에세이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말랑말랑한 감촉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고 평했던 다른 에세이들과는 달리 이 책은 살면서 맡았던 많은 향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추억에 젖게 만들었다. 꿈을 꾸던 시간이 떠올랐다. 무더운 열기 속에서 걸었던 프랑스의 어느 도시가 떠올랐다. 포근하게 감쌌던 공간이 떠올랐다. 그렇게 몇 주간 내게 스몄다. 내가 사랑하는 냄새들을 떠올렸다. 그의 책 일부처럼 ‘내가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냄새’를 하나씩 떠올려 꾹꾹 눌러 써 내리면서 이 책을 덮는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냄새
할머니 댁에서 나는 쿰쿰한 습기와 섞인 비린내, 굶주린 배를 안고 현관문을 열면 나는 엄마의 저녁 준비 냄새, 온 가족의 생일의 시작을 알리는 시큰한 겨울 냄새, 비 오는 날 전 부치는 냄새, 바싹 마른 빨래 냄새, 고기 굽는 고소한 냄새, 겨울 동안 손이 노래지도록 까먹을 귤 냄새, 서점에서 나는 책 냄새, 아빠 옷에서 나는 냄새, 애정 어린 고양이의 그루밍 후 손에 남는 비릿한 침 냄새, 커피숍 문을 열면 나는 커피 냄새,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릴 때 나는 샴푸 냄새, 할머니 냄새, 아기들한테서 나는 열감 어린 냄새, 새 책에서 나는 덜 마른 잉크와 본드 냄새, 밤늦게 끓인 라면 냄새, 밥 짓는 냄새, 더운 날 불어오는 한 줄기 찬바람 냄새, 책장에서 풍겨오는 낯선 이의 기억 냄새.
* 대상 도서를 <난다 서포터즈 2기> 활동을 위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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