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산문《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좋은 책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궁금해진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그 감동을 망치지 않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지 좋은 글일수록 그 글을 쓴 사람도 좋은 사람일 것이라 부푼 기대를 한다. 그렇기에 책과 사람이 닮은 때 오는 감동이 더 깊다.
오늘 만난 사람이 그랬다. 그의 시는 내게 좋은 기억이었고, 산문은 감동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들이 아끼는 게 눈에 보여 궁금했다. 이런 단어를, 문장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작년 초, 그의 글이 유독 생각나 전자책으로 그의 시를 읽었고, 종이책이 읽고싶어 한국에 두고 온 그의 산문집이 떠올랐다. 그 책을 읽은 계절과 공간, 그때의 기분이 생생히 떠올랐다. 짙은 향수에 부모님께 부탁해 택배로 그 책을 받았다. 초록색 표지의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었다. 창가에 올려두고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책 속의 글들이 짙은 초록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즈음 표지를 새로 갈은 그의 책이 나온다는 걸 보았던가. 갈색 표지를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책의 색은 이 색에 더 가까울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읽은 그 초록을 그 섬에 두고 떠나왔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넘기고서 돌아가던 길, 이 책은 어디로 가게 될까 생각했다. 내게서 그 사람에게 갔듯, 그 사람에게서 또다른 누군가에게로 갈 터였다. 그렇게 돌고돌아 그 섬에서 묻혔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네 번째 표지 갈이였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또?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오늘 그 책의 20만 부 기념 작가와의 만남에서 그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입장하면서 한 아름의 선물 꾸러미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보니 그 꾸러미 속에 네 번째 표지가 있었다. 이 색을 무슨 색이라고 하더라. 군청색은 아니고, 파란색은 더더욱 아니고, 청록색도 아닌 물먹은 듯 탁한 푸른색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새로운 옷을 입은 책을 받아드는 데 마음 한편이 울렁였다.
타국에 두고 온 초록이 떠올랐고, 내 추천에 지인이 집어든 갈색이 떠올랐고, 오늘 행사장 입구에서 본 분홍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손엔 그의 2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이 들려있었다.
20만 부라니. 행사를 진행하신 유희경 시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감히 가늠해보기도 어려운 숫자다. 잠실 주경기장에 수용가능한 인원이 7만 명이라고 하니, 그 넓은 곳을 세 번 가까이 채울 수라고 하셨다. 책을 구입하고, 선물하고, 책장을 넘겼을 얼굴들을 가만 상상하다보니 뭉클했다. 그 책을 건넬 때의 마음이 느껴져서였을까.
많이 웃었다. 라디오 사연소개 형식을 차용한 구성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났다. 매일 6시간씩 라디오를 듣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일을 업으로 꿈꾼 때와 그때의 내가 겹쳐 애틋하기도, 그립기도 했다.
1시간 반 정도 내가 좋아한 글을 쓴 사람을 멀리서나마 만나보니, 그 글이 더 좋아졌다. 그리고 그 사람이 궁금해 더 많은 글을 읽고 싶어졌다. 좋은 글과 책과 사람의 순환이 계속해서 일어나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도록.
박준 시인의 산문집 제목처럼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누군가의 울음을 함께 듣고 나누는 것, 감히 그 심정을 입안에 넣고 녹여보는 것, 그의 울음이 그치기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주먹을 꼭 쥐어보는 것. 그것이 언젠가는 돌고돌아 무언가를 달라지게 하지 않을까. 손톱만큼 작은 변화일지라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선물로 받은 책을 다시 펴 읽어보았다. 짙은 초록에 갈색이 덮였고, 이번엔 또 푸른빛이 더해진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빛깔이 더해져 남는 책이 많지는 않다. 그래서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책이고,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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