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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iyou Sep 12. 2020

둘, 아니 셋의 교환일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 · 요조, 문학동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임경선 작가와 가수 요조의 교환일기다. ‘여자’이자 ‘개인’인 임경선과 요조, 이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간 기록이다. 붉은빛 양장본의 표지를 넘기면 둘의 비밀스러운 세계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일기에 자물쇠는 없다. 이 세계를 들여다볼 준비가 된 사람이면 누구라도 책장을 넘기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들어설 수 있다. 책 제목처럼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른세 번의 교환일기는 여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머릿속에서 한 번쯤은 굴려보았을 만한 생각들이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할 줄 알고, 늘 깨어있고자 노력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어느덧 보편적 여성들의 이야기가 된다. 



기억 속의 교환 일기는 핑크빛 표지에 책장이 넘어가는 곳에 자물쇠를 걸 수 있는 것이었다. 일기장의 열쇠는 일기를 교환하는 당사자들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소중했고 비밀스러웠으며 재미있었다. 매일같이 만나고 함께하는 친구이면서도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던 것인지, 새삼스레 주고받을 비밀스러운 기록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도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다는 어떤 특정한 관계끼리의 ‘교환’이란 행위에 의미가 있었던 듯싶다. 이 책은 아주 어릴 때 교환일기를 주고받으며 좋아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기쁨을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비밀을 엿보는 듯한 울렁임과 불편함을 넘어, 쓰지 않았으나 함께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동시대의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느 부분에는 공감하고 또 어느 부분에선 반대의 입장을 떠올리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덧 두 사람의 교환일기의 끝에 다다를 것이다.



어느 부분에선 시니컬한 언니의 조언에, 어느 페이지에선 다정한 동생의 다독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 나는 요조의 입장이 되었다가 임경선의 입장이 되었다가, 또 어느 순간 ‘나’라는 개인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바라본다. 좋고 싫음에 대해, 나이 듦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젊음과 죽음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행복에 대해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이 책은 둘의 교환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셋의 교환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름다운 곳에 ‘살아서’ 이렇게 ‘걸으면서’ 이것들을 ‘보고’ 있다는 감각 하나하나가 너무 강하고 소중하고 절박해서, 가게마다 눈을 맞추고 골목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화분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숯불갈비 가게 옆에서 달궈지고 있는 숯 가까이 가서 그 열감을 느끼고 가게의 이름들도 발음해보았어요. 누구보다도 똑똑해진 채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아버린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써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까먹게 되겠죠. 까먹기 전에 얼른 말할게요. 너무 사랑하는 언니가, 제가,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이 여기 있어요. 있을 때, 잘해야 해요.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요조, 문학동네, 60쪽


저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 그 말이 정말 어려운 말이라는 것도 알아가는 와중이에요. 늘 깨어서 세상을 바로 보고 옳은 편에 서야 하지만, 옳은 편에 서 있으면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옳은 편에 섰다고 안심하면서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편이라는 명분에 취해서 옳지 않은 편에 선 사람들보다 더 깜깜한 혐오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나 자신을 의심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요조, 문학동네, 117쪽


인생의 어떤 국면에 고통이 찾아온다고 해서 미리부터 체념하거나 지고 들어가기엔 우리의 젊음이,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것 같아.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기쁨에 깨작대느니 고통이 동반되더라도 끝내 원하는 걸 가지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요조, 문학동네, 96쪽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는 데서 오는 잠깐의 우쭐함, 그러나 내일은 나를 조금도 찾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어떤 속담. 이 세 요소의 콤비네이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제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요조, 문학동네, 128쪽


인생의 한 시기가 끝나고 문이 닫혀버리면, 내 앞에 다른 문이 또 새로 열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우린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런 진실의 말들이 먹먹하게 들릴 때가 있다. 환절기 감기에 걸려서 마음이 더 약해졌나? 뭐, 어쩔 수 없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요조, 문학동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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