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웠는데》시인 허수경이 사랑한 시
시인의 말에서 허수경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겨진 시를 읽으며 그분들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싶더군요. 그 무서운 세월을 견디는 형식은 아니었을지.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하였을 때, 젊은 수용자들이 그 어둡고 캄캄한 시절을 견디는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을 택한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거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웠는데》는 그녀의 글을 읽는 내게도 비슷한 의미다. 허수경 시인이 좋아한 시들과 그 시에 대한 단상들을 한 데 엮은 이 책이 남겨졌다. 시인이 말하던 무서운 세월과는 또 다른 의미로 무서운 세월을 견디고 있다.
시는 이미지의 언어라고 한다. 그 언어가 하나의 이미지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함축적 언어들의 사이에서 생생하게 그 이미지를 상상해내는 것이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를 많이 읽어라’는 교수님과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지만 높은 장벽 탓인지, 어떤 시를 읽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핑계로 농축된 언어들을 멀리했다. 1년에 시집 한 권을 다 읽기도 어려워했던 나는 부끄럽지만 글쓰기를 전공했다. 요즘처럼 대학 졸업장이 부끄러운 때가 없다.
허수경 시인이 작고한 후, 세상에 나온 세 번째 책으로 안다. 그녀의 컴퓨터 폴더 속에 남았던 짧은 글들과 시를 엮은 책과 산문들을 엮어 낸 유고 산문집, 그리고 그녀가 사랑한 시에 대한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웠는데》. 앞선 두 책도 조금씩 읽어보았지만 지금 이 책만큼 오래도록 품었던 책은 없었다. 책 속에는 시인이 생전에 사랑하여 선정한 시들이 소개된다. 시에 무지한 내가 처음 보는 시들이 대다수다. 우리말로 된 시도 있지만, 번역된 시들도 있는데, 그중에는 시인이 직접 번역한 시도 있다.
번역이라는 작업에 대해 아주 짧게나마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문학, 특히 시라는 언어의 번역은 역자의 능력과 문체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을 느꼈다. 같은 원문이라도 번역하는 사람의 방식들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과 감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원문조차 해석해볼 수 없는 무지로 낯이 붉어지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책 속에 시인이 번역해 둔 시들이 마음을 울렸다는 것이다.
김춘수의 <강우> 뒤에 붙은 시인의 글이 인상 깊었다.
…… 갑자기 누군가가 이 지상에서 사라질 때 누군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진, 언제나 내 곁에 있었던 당신을 생각하며 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서럽다. 언제나 옆에 있었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추적추적 비가 오는데,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녁밥을 차리는 냄새가 나는데, 당신은 없다. … 비는 오는데 그는 내 곁에 없고 날은 저문다. 사랑하는 자를 잃고야 사랑의 자리를 보게 되는 인간사의 한 장면을 그려내신 김춘수 선생님께 이 시를 되돌려 드린다.(23쪽)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저녁밥을 차리는 냄새에 비유한 시와, 그 시에 대한 시인의 감상 덕에 나는 한참 그 페이지에 머물렀다. 짧은 리뷰에 오래도록 책장을 넘기지 못한 경험을 모두 소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지금의 계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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