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단 불꽃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고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는 2020년 3월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일명 ‘N번방 사건’을 최초 신고하고 보도했던 ‘추적단 불꽃’의 이야기이다. N번방을 처음 발견하고 검거하기까지의 추적과정의 기록뿐 아니라 그 여정 속에서 불과 단, 두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에세이도 실려 있다. 또한 N번방 사건 보도 후, 피해자와 전문가의 인터뷰를 갈무리하여 우리 사회가 취해야 할 후속 조치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가족들이 안위를 걱정할까 봐 씩씩한 척했지만, 실은 나도 가해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무서웠다.
우리는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다.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한 탓인지 각성 상태가 지속됐다. 수집한 자료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됐다.
N번방 사건을 처음 보도한 두 사람을 향한 관심은 N번방 사건 자체만큼이나 뜨거웠다. 평범한 20대 여대생 두 명의 신고를 통해 사건이 경찰의 귀에 들어갔고, 검거까지 이루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해자 연대를 끊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야 할 관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해 추적단 불꽃은 목격자이자 피해자가 되었다.
평범한 20대 취업준비생이었던 두 사람에게서 N번방 사건의 탐사보도라는 사건은 ‘평범한 삶’을 앗아갔다. 가해자의 검거를 위해, 취재와 보도를 위해 가해의 현장을 계속해서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심신은 지쳤고, 가해자들의 보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은연중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일상의 평범함을 잃은 것이 그립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끔 과거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 내 일상이 변한 대신 사회도 변했으니까. 지난 5월, 일명 ‘N번방 방지법’이 제정됐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형량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사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바라보면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했구나 싶어서 뿌듯하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변화의 바람은 분명 불고 있다.
나는 급진적이지도 않고, 적극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다. 뒤에서는 여성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피해에 격분하지만 앞으로 나서 목소리를 내기는 두려워 숨는 비겁한 존재다. 그런 내가 부끄러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애매하고 미적지근한 태도가 되레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뒤로 숨기 바빴다.
처음 대학 내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의아했고 불편함을 느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여성 혐오를 행하는 남자들을 똑같이 혐오하는 것인가? 탈코르셋을 위하여 모두 탈브라를 해야만 하고, 숏컷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남자와 연애를 해서는 안 되는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극단적인 페미니즘에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결국 한남들이 문제야’하고 끝나는 대화에 불편함을 느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의 모임에서 자신이 탈 브라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으며,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연애를 하는 이들조차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럼 남자를, 여자를 서로 미워하고 배척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에 슬픔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혹 이런 내 생각과 느낌, 경험이 잘못된 것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어디서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기만 했다. 그래서 모임에 나가면 가만히 듣고 있는 것으로 나의 부족과 무지를 숨기려고만 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의 2부, 불과 단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혼란스러움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머리 길이 하나만으로 나를 자신과 ‘같은 부류’로 여기고 친근하게 눈인사를 했다가, 애인이 나타나자마자 내가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가부장제 타파를 위해 당신은 이것도, 저것도 하면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며 여성을 타자화하여 지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서글프다.
나는 애인이 없는 척하며 다녔다. 완벽한 페미니즘은 ‘남성’이 없어야 이뤄낼 수 있다는 분위기에 자아가 침몰되던 시기였다.
극단적이었다. 나는 내가 꿈꾸는 페미니스트상을 지어내 행동하면서 이것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취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취한 사람 눈에 글이 제대로 읽힐 리가 없으니 더 이상 페미니즘 책을 읽지 않았다.
이들의 고백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진짜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그의 등을 도닥여주었던 애인처럼 그 이야기가 불편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평소에 내가 마주했던 고민을 그들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더는 외롭지 않았다. 작게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지금도 홀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피해자가 얼마나 많을까. 성범죄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 내밀어줄 이가 있다는 걸 피해자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사회가 몫을 개인이 온전히 짊어지는 것은 부당하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겪었던 수많은 불편과 공포를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추적단 불꽃이 밟아온 자취를 따라 걸으며 독자 스스로도 두 사람의 불길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추적단 불꽃이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여러 매체와 반복적인 인터뷰를 하고, 정신적 피해를 버텨냈던 것은 세상의 관심이 피해자의 피해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가해자의 것으로 향하여 변화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힘이 없다. 하지만 함께 연대하면, 추적단 불꽃의 행보처럼 우리의 목소리는 뜨거운 불꽃이 되어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세상을 변화 시키는 목소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불과 단이 지치게 되었을 때,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불씨를 지필 연대가 필요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장 뜨거운 목소리가 된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잘 쓰인 글이라 술술 읽히면서도 그 내용의 무게 때문에 쉬이 책장을 넘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책을 읽어내야 했던 것은,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버겁게 느껴지는 일주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이 땅에서 살아남아, 외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연대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기에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추적단 불꽃은 성범죄 피해자의 고발을 지지한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몸을 통과해 심장을 건드렸다. 피해자의 상처가 나의 고통으로 바뀌어 발화하는 순간, 뜨거운 용암이 심장에서 솟구친다.
우리가 써 내려간 지난 1년간의 기록이,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의 발자취로 이어지길 바란다.
버겁고 힘겨워도 우리는 이 땅에 살아남아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며, 연대하는 것으로 그 불길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글에 쓰인 인용구의 출처는 모두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추적단 불꽃, 이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