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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Dec 22. 2020

로마 스페인 광장(1)_싸움터가 된 광장

김홍철의 건축미행 _ 현대엔지니어링 기고 


로마 스페인 광장 계단 위에서 한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을 한다.

"저 사실 간밤에 학교에서 도망 나왔어요."

갑작스러운 여자의 고백에 남자는 놀라며 여자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선생님하고 문제가 있었나요?"

"글쎄요. 한두 시간만 나와있으려고 했는데, 수면제를 먹어서 그렇게 됐어요. 이제 택시를 타고 가야겠어요."

여자는 곧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와 더 함께 있고 싶었던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에게 시간을 내어달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그러기 전에 조금만 시간 내주실 수 있어요?"

"한 시간 정도 있어요."

"하루 종일은 안 되고요?"

남자의 뜬금없는 제안에 여자는 무언가 해볼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야길 이어간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걸까요?"

라고 남자가 되묻자, 여자는 크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하루 종일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요!"

여자는 갑갑한 공주의 삶에서 벗어나 여태껏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이 장면은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이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에서 오드리 헵번은 그녀가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젤라또를 먹으며 그레고리 팩에게 했던 이 대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스페인 광장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난 그곳으로 가기 위해 포폴로 광장에서 로마 시내로 뻗은 세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선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 여겼기에 난 그 길로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들어섰다. 내가 가는 길은 바부이노 길인데, 그 길로 곧장 들어가면 스페인 광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포폴로 광장에서 스페인 광장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선택한 길이기에 명품 상점과 카페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고, 관광지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마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현대엔지니어링에 기고한 글입니다.  



스페인 광장으로 들어가는 바부이노 길 (2018년 가을 로마에서)


(좌) 바부이노 길 끝에서 만난 스페인 광장 초입 _ 저 멀리 계단 형태가 보인다 (2018년 가을 로마에서)


얼마 걷지 않아 곧 커다란 광장이 펼쳐졌다. 광장 중앙에는 파스타 접시처럼 생긴 작은 분수대가 있었고, 왼편으로 계단이 보였다. 로마의 휴일에서 보았던 그 계단이었다. 로마의 휴일 이후로 계단에서 젤라또를 먹어야 한다는 소릴들었지만, 내가 스페인 광장에 갔을 때는 아무도 젤라또를 먹지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워낙 많은 사람들이 계단 위에서 오드리 헵번에 빙의해 모두 젤라또를 먹으니까 계단이 온통 젤라또 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국에서 계단 위에서 젤라또를 먹으면 벌금형을 매기겠다고 하자 지금은 아무도 계단 위에서 젤라또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영화가 만들어내는 힘은 대단한 것 같다.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한 이유도 그러하다.

스페인 광장에서 바라본 성삼위일체 성당과 계단 (2018년 가을 로마에서)



이 광장은 두 개의 삼각형 부지 위에 성삼위일체 성당(Trinita dei Monti)과  스페인 대사관 그리고 팔라초 프로파간다(Palazzo Propaganda)가 광장에서 주요 건물의 역할을 하고 있고, 광장의 나룻배 분수와 성당 앞의 오벨리스크 그리고 대사관 앞 기념 원주가 광장을 장식하고 있다.

스페인 광장 배치도




그런데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이 곳을
왜 다른 나라의 이름을 빌려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렀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오래전부터 주교황청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교황청 스페인 대사관 건물이지만, 당시 대사관은 원래 로마의 귀족 가문인 모날데스키 가문의 궁이었다. 지역 유지였던 모날데스키는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스웨덴에서 건너온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국가 반역죄로 몰려 참수형을 당하고, 그의 재산은 모조리 빼앗겨 모날데스키 궁은 교황청으로 넘어가 경매에 부쳐졌다. 교회 주변에 있던 프랑스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모날데스키 궁을 사들이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궁의 주인은 스페인이 되어 모날데스키 궁은 현재 교황청 소속의 스페인 대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에 교황청은 기능을 확장하면서 해외선교본부로 팔라초 프로파간다를 지어 교황의 권위를 드높였다. 그런데, 스페인 광장에서 다시 계단 위를 바라보면, 종탑이  개인 성당이 하나 우뚝 서있다. 이는 성삼위일체 성당으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소유가 아닌 프랑스 소유의 성당이다.



스페인 광장의 스페인 대사관과 기념원주 / wikipedia


도대체 이 지역은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각 국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걸까?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는 르네상스의 중심인 이탈리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나중에 스페인과 영국까지 합세해 무려 여덟 번의 전쟁이 벌어져 이곳은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혼돈의 격전지가 되었다. 이를 이탈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했으나 주로 전쟁을 한 상대는 스페인이었다. 나폴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1501년, 프랑스는 스페인을 이기고 나폴리를 차지한다. 그 기념으로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고딕 양식의 건축을 스페인 광장 언덕 높은 곳에 지었는데, 그 건물이 바로 스페인 광장 위에 서 있는 성삼위일체 성당이다. 하지만 프랑스가 성당을 짓기 시작한 이듬해, 프랑스는 스페인에게 나폴리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성삼위일체 성당의 건축은 중단되어 지지부진해지다가 1585년이 되어서야 현재의 모습대로 완공되었다. 성당 앞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포폴로 광장에 있는 것처럼 이집트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이 아니라 로마에서 직접 제작한 모조품이다. 기원전 아우렐리 안 황제가 람세스의 오벨리스크를 가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직접 제작해 살 루스트 정원에 두고 있었던 것을 훗날 성삼위일체 성당 앞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 오벨리스크의 이름이 살루스티아노 오벨리스크(Sallustiano obelisk)라 부른다.


성삼위일체 성당과 오벨리스크
성삼위일체 성당 내부 모습 /


당시 성당을 지어졌을 때만 해도 주변은 그저 경작지가 널려있는 거주지였다. 언덕은 현재처럼 계단이 있지 않아 지나다니기 불편한 경사지에 불과했다.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은 프랑스 소유였고, 아래는 스페인 소유였기에, 언덕 위 성당이 있는 광장을 프란시아 광장이라고 불렀고, 언덕 아래 광장을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렀다. 누가 봐도 두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형상이었다.


17세기 초에 교황은 성삼위일체 성당과 스페인 대사관 사이에 있는 광장 중앙에 분수대를 만들자고 당시 조각가인 피에트로 베르니니와 그의 아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에게 제안한다. 원래 분수대는 성삼위일체 성당 아래에 만들 계획을 했으나, 수압이 낮아 결국 지대가 낮은 스페인 광장에 만들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베르니니 부자는 분수대를 물이 넘치는 나룻배 모양으로 만들었다. 1598년에 로마에서 대홍수가 일어나 테베레 강에서 스페인 광장까지 밀려 들어온 배가 물이 모두 빠질 때까지 광장에 남아있었던 걸 착안해 조각했던 것이다. 분수대를 짓는 과정에 피에트로 베르니니는 죽고, 그의 아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가 분수대를 마저 완성했다. 분수대의 이름을 바르카차 분수대라고 불렀는데 바르카차는 난파되어 쓸모없는 배라는 뜻이다. 분수대가 만들어지고 나자 주민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물을 길을 수 있어 광장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던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분수대가 만들어지면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며 대립은 끝이 나질 않았다.


스페인광장에서 올려다 본 성삼위일체 성당과 계단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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