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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Dec 31. 2020

로마 스페인 광장(2) 축제의 무대가 된 광장

축제의 무대가 된 스페인 광장


스페인광장

로마교황청은 언덕 아래 스페인 광장과 언덕 위 성삼위일체 성당 사이를 이으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해왔었지만, 스페인과 프랑스의 대립은 쉽게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8세기가 되서야 비로소 교황청은 과거에 매입했던 스페인 광장 언덕에 계단을 만들어 서로 잇기로 결정한다. 


스페인 계단이 만들어지기 전의 모습 (그림:Giovanni Battista Palda) / teggelaar.com


이곳을 이으면 과거 식스투스 5세가 이뤄낸 로마개조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포폴로광장,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십자가 성당을 이어 로마의 길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스트라다 펠리체(Strada Felice)에서 큰 방점을 하나 더 찍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교황청은 스페인 계단 건축공모를 진행했고, 당선된 건축가는 프란체스코 데 산티스(Francesco De Sanctis, 1679~1731)였다. 원래 스페인 계단은 나룻배 분수대를 만든 쟌 로렌조 베르니니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프랑스와 교황청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계획은 취소되었고, 결국 공모로 당선된 산티스에게 맡겨졌다. 산티스의 계획안은 스페인 광장의 나룻배 분수와 성삼위일체 성당을 통합하는 계획으로 스트라다 펠리체와 바부이노 거리를 아래위로 연결하는 동시에 도시흐름을 크게 바꾸어버릴 수 있는 랜드마크의 기능을 하는 계획안이었다. 스트라다 펠리체의 가로축에 스페인 계단을 놓는다는 것은 성삼위일체 성당에서 교황청을 잇는 거대한 세로축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했고, 테베레 강의 리페타 항구와 이어지는 교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이었다. 



22미터의 언덕의 높이를 연결하는 스페인 계단은 계단 12개에 계단참 하나를 이루는 방식으로 총 135개의 계단으로, 마치 연극무대가 있는 대극장과 같이 계단 가운데 포디움을 두고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는데, 이는 스페인 계단이 길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 이상으로 이벤트성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특별한 날이 있으면 하나의 무대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을 Platea Trinitatis라고 불렀는데, 이는 성삼위일체 성당의 무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나중에 사라져버리고 모두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는데, 이유는 바티칸이 프랑스를 싫어했던 이유에서다. 로마를 점령했었던 나폴레옹을 교황청에서 좋아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성 삼위일체 성당 앞 프란시스 광장의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졌고, 지금은 이 지역 모두를 스페인 광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스페인 광장의 평면도 (출처미상) / 스페인광장 평면을 보면 서로 방향이 맞지 않는다. 성당과 스페인광장 그리고 계단이 만들어진 시기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스페인 계단이 완성되고나서 스페인광장에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주변 건축물이 재건축되는 등 광장의 모습이 활기차게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부동산 가치는 크게 오르게 되었다. 거기다가 스페인광장에서 테베레 강을 잇는 콘도티 길 역시 상업적으로 크게 가치가 올라 각종 상점들이 크게 늘었고, 현재에도 명품거리로 꽤나 유명해져 사람들의 많은 발길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곳으로 성장했다. 이후에도 괴테, 안데르센 등 많은 세기적인 예술가들이 찾아와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을 정도니 얼마나 멋진 곳인지는 이야기만 들어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1835년의 스페인 광장 그림 (그림 : Giovanni Battista Piranesi) / wikipedia

그렇게 멋지게 시작했던 스페인 광장도 위기가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지점으로 만들어준 스페인 계단은 지어진 지 2년 후, 폭우에 계단 옹벽이 무너져버렸다. 건축가 산티스는 고소를 당해 배상을 해야만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건축가에 있어 자신이 만든 건축물이 무너졌다는 것은 경력에 매우 치명적이었다. 결국 산티스는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사건이 일어나고나서 3년 뒤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차지하려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벌였던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가 스페인을 이겼었지만, 이전부터 스페인광장으로 불렸었던 까닭에 프랑스는 이곳을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굉장히 불쾌했다. 그 이유로 프랑스 황제 루이12세가 스페인 광장을 내려다보는 기세로 언덕 위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성당을 짓기로 한 역사가 있었듯, 이곳에는 스페인 글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도 매우 특이하다.


각국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스페인 광장을 반으로 나뉘었던 공간을 계단으로 서로 잇는 것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이 화해했다는 기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스페인광장은 현재에도 마치 축제의 무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6세기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로마개조사업은?"


로마의 도시계획은 14세기 르네상스 때부터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미술과 건축의 아름다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식스투스 5세가 로마개조사업을 시작하면서 로마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식스투스 5세는 스위스에서 건너와 미켈란젤로의 조수로 일했었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 (Domenici Fontana, 1531~1607)에게 건축물과 광장을 연결할 도로를 정비할 계획을 던져준다. 단지 로마가 낙후된 거리와 시설을 건축적으로 재정비할 목적과 함께 종교적인 뜻으로 무져가는 가톨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식스투스 5세는 로마에 있는 일곱 개의 큰 성당을 모두 연결해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만들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펠리체 거리를 정비하면서 시작되었다. 식스투스 5세는 교황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좀 더 정비하고 이어지지 못한 길을 추가로 만들어 로마의 길을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속도만큼은 그들과는 달랐다. 가장 먼저 정비한 길은 스트라다 펠리체이다. 스트라다 펠리체는 로마의 시작인 포폴로 광장에서부터 세 갈래로 뻗어나간 길 위 언덕에 있던 길을 포폴로 광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광장과 성삼위일체 성당, 성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그리고 성십자가 성당까지  4km를 일직선으로 모두 연결한 길이다. 그리고 각 성당 앞에는 그 지점이 하나의 랜드마크와 같은 곳임을 알리는 듯 오벨리스크를 하나씩 높이 세웠다. 스트라다 펠리체는 포폴로 광장에서 성십자가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을 계획했지만, 포폴로 광장에서 성삼위일체 성당까지 잇는 길은 언덕이 워낙 험난해 완성하지 못하고, 성삼위일체 성당에서 성십자가 성당까지 잇는 길까지가 현재 남아있는 스트라다 펠리체이다. 


스트라다 펠리체를 완성하고나서, 폰타나는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사람들이 여러 곳을 쉽게 갈 수 있게끔 마치 로터리처럼 사방으로 다시 길을 냈다. 첫 번째로 성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과 연결할 수 있는 길인 그레고리아나 길(Via Gregoriana)을 만들었다. 이 길은 현재 메루라나 길(Via Merulana)로 불려지고 있다. 성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다시 콜로세움으로 가는 성 조반니 길(Via di S. Giovanni)을 만들었다. 이 길은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에 포로로마노와 크고 작은 성당을 연계하고 있는 중요한 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성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캄피돌리오 언덕과 연결한 파니스페르나 길을 만들어 코르소 거리와 연결했고, 마지막으로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성 로렌조 대성당과 연결한 성 로렌조 길을 만들어 폰타나는 로마의 길 위에서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식스투스 5세가 집권해 있던 단 5년 안에 만들어진 도시계획이었다. 

식스투스 5세 때 건축가 폰타나가 만든 스트라다 펠리체 프로젝트





나는 이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고 내렸다. 가파르지 않은 계단이었기에 가능했지만, 여기저기 서서 보이는 다른 광경들을 눈에 오랫동안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분수대에서 보이는 성삼위일체성당은 기품이 있었고, 계단 중앙 계단참 옹벽에 쓰여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는 오히려 스페인광장을 더 신비하게 만들어주었다. 분수대에 서서 계단을 바라봤을 때는 계단에 빽빽이 앉아있는 사람들이 나의 연극을 보러 온 관객같이 느껴져 잠시 민망해지기도 했다. 이 무대를 밟고 언덕 위 성당 앞에 섰을 때 테베라 강까지 뻗어있는 콘도티 거리를 등지고 있던 광장은 그 넓은 포폴로 광장의 위용과는 또 달랐다. 


멋진 장면을 품은 이 광장에서 나는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다음 목적지를 가야했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지만, 광장을 두고 가는 발걸음마다 아쉬워 다시 뒤를 돌아봤더니 커다란 야외무대가 다시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스페인 광장은 여행자 모두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스페인 광장 계단 포디움에서 내려다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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