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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Jan 01. 2021

건축가의 실험실(가우디, 프랭크 게리 그리고 알바알토)


프랭크 게리의 건축실험실이 된 게리 하우스 / 건축의 탄생에서


화가는 캔버스나 종이에 그림을 수도 없이 그리면서 실력을 쌓고, 운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장에서 자신을 꾸준히 단련하며 자신의 기량을 쌓는다. 하지만, 건물은 짓고 바로 짓고 무너뜨릴 수가 없어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을 쉽게 연습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건축가는 매번 건축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그 중 대표적인 건축가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성가족 성당, Sagrada Famila, 바르셀로나, 스페인, 1882~ 현재)으로 유명한 안토니 가우디이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구엘공원, 구엘궁전, 카사밀라, 콜로니아 구엘교회 제실은 어떻게 보면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더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실험한 도구였었다. 가우디는 계획이 있었다. 그는 오로지 신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한다는 것을 자신이 평생이 가져갈 하나의 숙제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가우디는 자신의 건축을 실험할 곳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마침 나타난 구엘덕분에 가우디는 구엘궁전이 자신의 완벽한 건축실험을 위한 곳으로 만들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게 바쳤던 가우디의 건축실험은 다음과 같다.


가우디는 건축물에 이야기를 심어 메시지를 던졌다. 구엘궁전(Palau Guell, 바르셀로나, 스페인, 1886~1890)의 파사드(facade, 건물의 전면)를 보면 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철문 양쪽에 에우세비 구엘의 이니셜인 'E'와 'G'를 좌우 대문에 각 하나씩 주물로 글자를 만들어 '여기는 내집이오.'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다가 철문 가운데에는 카탈루냐의 깃발문양을 넣은 철장식 위에 두 날개를 활짝 편 불사조를 올려놔 에우세비 구엘의 불사를 상징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글자와 상징성 있는 이야기를 심어 메시지를 심은 기법을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적용했다. 이것은 구엘별장이나 구엘공원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가우디는 구엘궁전에 있는 중앙홀을 신을 모시는 예배당처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신성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중앙홀은 두 개 층 규모의 높은 천장을 가진 돔에 84개의 작은 구멍을 내어 외부의 빛이 내부로 들어오게 했는데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별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중앙홀에 파이프 오르간을 두어 공간의 울림을 연구했다. 가우디는 이 모든 실험을 그대로 사그라다파밀리아에 적용해 성당에 보다 완벽을 기울였다. 


(좌) 구엘궁전 입구 (우) 구엘궁전의 중앙홀 / wikipedia, cnn.com



그의 마지막 주택건축인 카사밀라(Casa Mila, 바르셀로나 스페인, 1906~1912)에서도 실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카사밀라의 벽면을 보면 모두 다른 모양의 돌을 맞대고 쌓아서 거대한 하나의 바위산으로 만들어져 있다. 당시에 비정형의 건축물을 그릴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에 가우디는 도면을 그리지 않고, 미리 만들축소모형을 보고 건축을 완성했다. 시당국에서도 도면을 제출하지 않은 가우디에게 몇 번이고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고집스런 가우디는 결국 허가를 받아내고 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역시 도면이 없이 축소 모형을 참고해 하나씩 만들어냈다. 카사밀라는 사실상 거대한 마리아 조각상의 받침대에 불과했다. 가우디는 애초부터 카사밀라를 신을 위한 건축으로 만들고 싶어서 거대한 마리아상을 카사밀라 옥상에 올릴 것이라고 건축주와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지만, 그 시기에 비극의 1주라고 불리는 스페인 폭동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교회를 모두 불태우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건축주는 카사밀라 옥상에 마리아상을 올렸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것만 같아 그 계획을 포기하자고 가우디에게 전한다. 가우디는 계획대로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마리아상을 옥상에 올리지 못해 카사밀라는 그렇게 미완성이 되었다. 


가우디의 카사밀라 / wikipedia


가우디는 사그라다파밀리아의 구조를 고민했다. 총 18개의 높은 종탑으로 만들어질 거대한 성당은 구조가 안정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가우디가 선택한 방법은 거꾸로 매단 수많은 추였다. 이것을 거꾸로 보면 성당의 안정적인 모양이 보였다. 가우디는 이 방법을 구엘의 마지막 건축인 콜로니아 구엘교회 제실에서 사용했다. 이 경우는 거꾸로 사그라다파밀리아에서 실험했던 것을 콜로니아 구엘교회에 사용한 경우이다. 구엘이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만 못했던 구엘은 죽기 전에 교회를 짓고 싶어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본당이 지어지지도 못한채 공사는 중단되었고, 곧 구엘은 심한 독감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사르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구조를 위한 정역학 모델 / wikimedia

이처럼 가우디의 건축은 실험은 오로지 신을 위한 것이었다. 


핀란드 출신 건축가인 알바알토는 자신의 건축 실험실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구디자인 회사 아르텍(ARTEK)을 설립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모더니즘 국제주의 건축가라 불려지는 걸 싫어해 핀란드 고유의 색을 입혀 그만의 독특한 건축관을 만들어 나간 건축가였다. 알바알토는 벽돌과 나무와 같은 따뜻한 건축소재를 좋아했다. 그가 파이미오 결핵 요양원(Paimio Sanatorium, 파이미오, 핀란드, 1933)건축으로 크게 성공한 후에 비푸리 도서관(Viipuru Library, 러시아, 1927~1935), 빌라 마이레아(Villa Mairea, 노르마르쿠, 핀란드, 1937~1939) 외에도 많은 건축을 했지만, 특히 그는 빌라 마이레아에서 그의 아내와 건축주인 굴리크센 부부 연합으로 800점의 도면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그의 건축세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염을 토했다. 알토는 빌라 마이레아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건축실험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토는 무라찰로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그곳에 자신만의 건축실험별장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여름별장의 이름을 코에타로라고 불렀다. 핀란드어로 코에는 실험, 타로는 집을 의미한다. 


코에타로 / wikimedia


알토는 코에타로를 기초없이 기둥을 일정하지 않게 자유롭게 배열해 'ㄱ'형태로 만들었다. 그곳에 주공간으로 거실과 식당 그리고 침실을 만들어 안마당을 감쌌다. 부공간은 게스트룸으로 사용했고, 그 옆으로 살짝 떨어뜨려 사우나를 설치했다. 서쪽과 남쪽은 호수방향으로 열고, 동쪽과 북쪽은 숲방향으로 창을 내어 어느 방향이든 다양한 경치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불은 건축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안마당 중앙에 화덕을 설치해 거실의 일부처럼 꾸몄다. 거실과 식당은 한 군데로 모으고 구역을 파티션으로 나눠 사용했다. 추운 지방이라 벽난로는 반드시 필요해서 설치했지만, 태양열로도 난방을 했다. 여기에서 알토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벽돌로 이음새를 조절해 패턴을 자유롭게 실험했다. 


코에타로 평면도 / 건축의 탄생에서

알토는 실험주택을 만들고 나서 시당국에 많은 세금을 물어야만 했다. 개인 별장에 대한 핀란드 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알토는 이것은 집이 아니라 건축실험을 하는 장소라고 우겨댔지만, 공무원이 곧이 들어줄 리 없었다. 법 아래 모두가 공평해야만 하지 않느냐는 핀잔만 듣고 그는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코에타로는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난잡해 보이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진 많은 건축실험으로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멋진 건축을 지으며 세계적인 건축가로 부상했다. 


알토의 코에타로보다 더 난해한 건축실험실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동네주민들이 집근처를 지나가기가 무서우니 철거해달라고 관공서에 신고를 했을까? 기괴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건축물의 주인은 다름아닌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은 프랭크 게리이다. 게리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에 가득했다. 나무 블록으로 멋진 도시를 만들기도 했고, 물고기의 유연한 모양을 좋아해서 욕조에 먹으려고 구입한 잉어를 풀어 기르기도 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게리는 도자기 수업을 받던 중에 교수의 눈에 띄어 건축수업을 하라고 제안을 받아 건축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다가 일본 문화에 흠뻑 빠지게 되는데, 게리에게 있어 일본미술과 건축은 새로운 세계였다. 그는 이른바 덕질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만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덕질을 한참 하고 있을 때, 르 코르뷔지에라는 건축가를 알게 되었으나, 게리는 그를 재미없는 건축가라고 무시했다. 그러다가 그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되어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게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고, 자신이 무지했음을 인정하고 된다. 그 때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배우며 지금의 건축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반듯한 직선의 건축을 주로 설계했다. 하지만, 게리 본래의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 모더니즘 건축에 금방 질려버렸다. 좀 더 자유로운 선으로 건축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팝아트 조각가 골덴버그, 영화인 댄지거,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이외에도 당시 잘나간다는 예술인과 교류하면서 그의 미적인 감각을 키워 나갔고, 1978년 게리는 자신의 집을 지어서 건축을 실험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리 하우스 / wikimedia


게리의 집은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있다. 원래 네덜란드 지방에서 유행하던 형식으로 지어진 일반 주택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집 중앙 계단실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침실과 같은 사적공간을 만들고, 남쪽으로는 거실과 같은 공적공간을 만들어 기능별로 공간을 양분했다. 그러다가 낮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벽을 세웠다. 이후로 주방과 식당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물 우측에 함석판을 세워 식당과 주방 공간을 만들고, 주방과 식당 공간에 빛을 들이기 위해 유리 큐브 형태의 창을 만들었다. 그렇게 게리의 실험주택은 기괴한 모양으로 점점 변해갔다. 그는 10여 년동안 그렇게 자신의 집을 부수고 고치면서 게리만의 건축관을 완성해 나간다. 하지만,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을 계속해서 건축 실험실로 사용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의 아내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고, 그는 수영장을 추가로 만들어 일반 가정집으로 기능을 돌려놓았다. 


게리하우스 건축과정 / 건축의 탄생에서


게리가 만든 괴상한 집은 세간에 이슈거리가 되었지만, 이 집은 해체주의 건축의 상징이 되어 많은 후발주자들을 만들어냈다. 게리는 이 집으로 인해 2012년에 미국건축가협회(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에서 상을 수여받는다. 게리는 자신의 집에서 건축실험을 해나가면서 산타모니카 쇼핑센터(1980), 항공우주박물관(1984), 피시댄스 레스토랑(1986), 윈톤 게스트 하우스(1986) 등 게리만의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게리는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에서 점차 벗어나 어릴 적 물고기의 유려한 형태를 좋아하던 원래 게리 스타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에 있는 비트라(Vitra) 가구회사에서 게리에게 공장건축의뢰가 들어왔다. 비트라는 공장단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전기누선인지 아니면 번개로 인한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큰 화재가 일어나 공장 단지의 절반이 불에 타 버렸다. 비트라는 공장단지를 재건할 목적으로 전 세계 유명한 건축가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 프랭크 게리에게 참여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처음에는 비트라에서 게리에게 작은 가구 박물관 설계를 부탁했었으나 게리의 역제안으로 공장 파사드 건축까지 더해졌다. 게리는 입체파 조각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보이기 위해 상자를 뒤틀어버렸다. 거기다가 자신의 집에서 실험한 대로 천장 곳곳에 유리를 내어 빛을 내부로 받아들여 건축을 완성했다. 여기서 게리가 비트라에 지은 건축이 게리건축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비트라 공장 건축을 짓고나서 게리는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랭크 게리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 Vitra.com


이후 그는 일명 춤추는 빌딩이라고 불리는 내셔널 네델란덴 빌딩(The Nationale Nederlanden Building, 프라하, 체코, 1992~1996)을 체코 프라하에 지어 크게 이슈화되더니 이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Bilbao Guggenheim Museum, 빌바오, 스페인, 1991~1997)을 지으며 그의 인생 최고의 역작을 세상에 남긴다. 

(좌) 내셔널 네델란덴 빌딩, (우)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 wikipedia



건축가는 건축을 향한 깊은 열망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을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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