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진기행>, 김승옥 / 영화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같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외로움은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나의 욕망과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상황의 괴리에서 온다. 보통 사람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면 상황을 바꾸고자 한다. 같이 있어도 외롭다면 헤어질 것이고, 혼자 있어 외롭다면 상대를 찾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쓸쓸함은 어쩌면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그 욕망마저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 상황을 바꿀 수 없거나 바뀔 리 없다는 자조적인 감정에 가깝다. 쓸쓸함에는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없는 지루함, 허전함,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쳇바퀴 돌 듯 사는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 뿐이다.
<무진기행>의 윤희중과 <헤어질 결심>의 장해준 모두 쓸쓸함을 안고 살아간다. 그들의 생활은 지루하다. 윤희중은 제약회사의 전무 자리에 오르기로 되어있지만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장해준은 살인 사건이 적은 현실에 권태감을 느낀다. 그들의 생활은 허전하다. 둘 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친밀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가정을 망가뜨리기에는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 모두 직업적으로 유능하고 주변에서 인정받는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 윤희중은 제약회사의 전무고 미끈하게 일을 처리해 버린다는건 우선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장해준은 형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의 사회적인 ‘깔끔함’은 보는 눈이 많은 도시에서 더 드러나는 듯하다. 도시는 깔끔한 곳이다. 반듯하게 포장된 도로, 눈에 거슬림 없이 수직으로 올라간 건물들, 차려입고 다니는 사람들. <헤어질 결심>에서도 도시와 연관된 장소의 배경은 모두 깔끔하다. 이포의 정신과 건물, 해준의 부산집, 부산의 취조실. 도시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너무 깔끔하다는 것.
깔끔함은 어쩌면 허전함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을 깔끔하게 하기 위해 청소를 하는데, 청소라는 것은 어찌보면 눈에 거슬리는 먼지, 물건들을 치워 없애는 행위다. 이렇게 모든 것이 치워진 곳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 숨을 곳이 없는 곳에서는 쉴 수가 없다. 도시에서의 인간은 쉬지 못하고, 쉬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일하게 된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 뿐인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쓸쓸함을 채우기 위한 은밀한 욕망이 있다. 윤희중에게는 성욕이, 장해준에게는 폭력이 그들에게 도피처가 된다. 윤희중은 스스로가 무진에서 하는 것이라곤 수음과 흡연뿐이라고 말한다. 장해준은 “살인 사건이 뜸하네. 날씨가 좋아 그런가.”라는 말을 하고, 이지구와 홍산호를 제압할 때도 필요 이상의 폭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성욕과 폭력은 진통제일 뿐 치료제는 아니다. 사랑만이 쓸쓸함을 달랠 치료제가 된다. 이사랑은 어지럽고, 치명적이고, 맥락도 없다. 사랑한다는 그 국어는 어색하고, 나를 철저히 붕괴시키지만 말이다. 깔끔하게 비워져 있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을 것만 같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 공간에 온갖 것들이 마구 쏟아지면서 채워진다.
윤희중이 하인숙을 사랑하게 되고, 장해준이 송서래를 사랑하게 된 계기를 콕 집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에 빠진 것만은 확실하다. 윤희중은 소주를 마셔도 깊게 잘 수 없고 불안하지만, 하인숙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깊게 잠에 든다. 장해준도 송서래의 옆에서 한 마리의 해파리가 되어 깊은 잠에 빠져든다. 마침내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윤희중과 장해준이 사랑하게 되는 하인숙과 송서래는 어떤가. 두 여자는 모두 상대방을 이용할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다. 하인숙은 서울에 가고 싶어서, 송서래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그들은 본능적으로 두 남자의 쓸쓸함을 간파하고 그 마음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는 법이 있던가. 두 남자가 쓸쓸했듯, 두 여자도 쓸쓸했다. 두 남자가 이토록 자신을 사랑해주는건 그녀들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 품위 있던 장해준이 자신을 위해 직업적 품위를 버릴 줄이야. 스스로가 싫을 정도로 속물인 나 하인숙을 진심으로 착한 사람으로 봐줄 줄이야.
이제 두 남자는 사랑을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기로 한다. ‘현대인’에게는 사실상 전부라고 볼 수 있는 자신의 가정과 직업을 걸고. 그런데 두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각 자 무진과 이포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 어쩌면 영원한 사랑으로 남으려고 한 걸지도 모른다. 종결되지 않은 미결 사건은 영원히 남으니까.
<무진기행>과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품위 있지만 쓸쓸한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줄 뿐이다. 사랑에 정답은 없다. 각 자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편지를 썼지만 결국에는 찢어버리고 서울로 돌아가는 윤희중이나 넥타이를 풀고 결혼반지를 빼버리고 서래를 찾아나서는 해준처럼. 그리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무진읍을 떠나는 버스에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홀딱 젖은 채로 바닷가를 헤매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