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의 신곡 “FEVER”의 뮤직비디오는 독신남의 판타지로 구성됐다. 주인공인 뮤지션 JYP는 옆집에 이사 온 조여정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인사차 그녀가 건네준 가래떡 앞에서 설레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환상 속에서 조여정은 다양한 의상을 소화하며 그를 유혹한다. 샤워 가운을 입은 그녀는 인접한 베란다에서 젖은 머리를 흩날리는 샴푸의 요정이었다가, 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윙크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도발을 서슴지 않는 팜므파탈로 변신했고, 보름달을 배경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방아를 찧는 새색시로 나타난다.
데뷔 시절부터 파격적인 컨셉은 JYP의 오리지널리티였다. 1995년 발표한 곡 “엘리베이터”의 가사는 대담했으며, 세계 최초로 시도한 비닐바지 의상은 실험적인 정신으로 가득했다. 나아가 그는 타인에게 잠재된 섹슈얼리티를 포착하는 데 능한 프로듀서였다. 순수한 소녀 가수는 JYP의 터치를 통해 타락한 천사로 탈바꿈됐다. 원더걸스의 멤버로 1세대 걸그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미는 “24시간”에서 맨발의 야생적인 퍼포먼스를 펼쳤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통해 국민 첫사랑으로 자리매김한 배수지는 미스에이 소속으로 폴댄스를 소화했다. 청아한 보이스와 명료한 딕션을 지닌 아티스트 박지윤은 만 18세에 “성인식”을 발표했으며, 당시 안무는 현재까지 한국 가요계에서 회자되는 반전으로 남아있다.
“FEVER”의 뮤직비디오는 “음음음”, “어머님이 누구니”, “살아있네”의 연장선에 놓인 JYP표 영상이다. 그래서 조여정의 도발과 요염한 포즈는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조여정이었을까. JYP는 TV 화면으로 “기생충”을 감상하던 중 연교를 보고 캐스팅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언뜻 보기에 “기생충”의 연교는 “FEVER”의 유혹녀와 크게 연결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수행하는 역할이 서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소파에서 박사장과 오고 가는 애정행각이 오래도록 화제였지만, 15세 관람가인 “기생충”은 배우의 노출과 자극적인 이미지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과 거리가 있었다. 대체 연교의 이미지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그는 유레카를 외치듯 조여정의 캐스팅을 확신했을까.
통시적인 관점에서 드라마와 영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별로 대중의 사랑을 꿰찬 스타는 20대에 찬란하게 피어났다. “맨발의 청춘”의 엄앵란, “깊고 푸른 밤”의 장미희, “뽕”의 이미숙,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 “모래시계”의 고현정, “클래식”의 손예진,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가인,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의 김태희…
그럼 여배우의 30대는 무엇인가. 전성기를 뒤로 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불과한가. 소설 “삼십세”의 작가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30살’을 늦은 오후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사그라드는 젊음을 체감하는 나이로 바라봤다. 작가의 부정적인 관점 대신 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접근해보면, 30대는 내면적인 성숙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다채로운 삶의 체험으로 노련해지며, 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진다. 올리브영 대신 백화점을 주로 찾고, 유니클로보다 몸에 어울리는 브랜드를 고르게 된다. 자기중심을 세우고 자리 잡은 일상에서 오는 여유는 외모에 반영된다.
올해로 39세인 조여정은 “기생충”에서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인간중독”처럼 조연의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집중되지 않았지만, 화면에 가까이서든 멀리서든 조여정은 주의를 그쪽으로 집중시킨다. 화려한 명품 의상과 과한 메이크업으로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그렇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딸과 철부지 아들을 슬하에 둔 어머니라는 설정에도, 원피스를 차려입은 정갈한 자태는 고혹적이다. 대저택의 좁은 공간에서 기택과 단 둘이 있을 때 혹시 정분나는 게 아닐까 문득 상상하게 될 정도이다.
조여정의 매력은 곧 숙녀의 매력처럼 보인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에 무심하지 않고 꾸준히 신체를 관리하며, 연륜과 경험으로 본인의 강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어필하는 여성의 뇌쇄적인 측면일 것이다. 넓은 이마와 보조개에 강조를 둔 조여정의 관능성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연교는 성공한 비지니스맨의 아내지만, 실상은 인형에 더 가깝다. 한밤 중 배드신의 효과가 강렬하게 전해지는 것은 연교가 전적으로 백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1950년대 백치미로 남심을 장악했던 여배우는 마릴린 먼로였다. 비록 전형적인 금발 미인은 아니지만, 세상 모르고 순진하다는 점에서 조여정의 연교는 흡사 마릴린 먼로의 부잣집 사모님 클리셰 버전과 같다. 그래서 “기생충”의 조여정은 섹시하며, 그 농밀함은 과거 수위 높은 노출신을 소화했던 “방자전”이나 “후궁”보다 진하게 다가온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조여정보다 아름다운 여배우는 누구인가. 떠오르는 몇 명 나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 조여정보다 매혹적인 여배우는 누구인가. 즉각 대답하기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현재 조여정은 누구보다 성숙미를 발산하는 배우이다. 따라서 섹시 컨셉의 귀재인 JYP가 그에게 보낸 러브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나 뮤직비디오에 담고자 시도했던 것은 숙녀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조여정의 캐스팅과 유사한 사례가 전에 있었다. 2007년 JYP는 “BACK TO STAGE” 앨범의 타이틀 곡 “니가 사는 그 집”을 발표하면서 배우 김혜수를 섭외했다. 어두침침한 조명 속 뮤직비디오에서 자녀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김혜수는 결실을 맺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쓰라린 후회였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김혜수는 “타짜”의 정마담과 “바람 피기 좋은 날”의 유쾌한 유부녀 역 이후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참이었다. “타짜”의 김혜수와 “기생충”의 조여정, 2006년 정마담은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요부였으며 2019년 연교는 대한민국 50만 미시족을 대표했다. 두 캐릭터가 갖는 공통분모는 30대 여배우가 가질 수 있는 매력과 깊은 연관을 지니며, 이는 JYP가 요구하는 덕목과 맞닿는 것처럼 보인다.
20대의 어느 순간보다 30대의 나날이 눈부신 조여정에게, 드라마 “99억의 여자”로 만개한 전성기는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것처럼 보인다. 한편 영화 속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배우의 매력을 읽어 낸 JYP의 안목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다음번 그는 누구를 섭외해 잠재된 매력을 구체적으로 다듬게 될까. 새빨간 홍시처럼 농익는 배우는 또 누구일까. JYP의 다음 선택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