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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Dec 26. 2019

백두산,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도 없는 영화

#스포일러 있습니다.


지난 12월 19일 개봉한 “백두산”은 CJ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찬 기획 영화이다. 약 200억을 넘어선 순제작비, 이병헌과 하정우를 필두로 한 스타 캐스팅, 휴면 상태인 백두산이 활동한다는 설정까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아성에 도전하는 영화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할 것인가’. 관객의 입장에 선 이해준, 김병서 두 감독은 재난 장르의 문법에서 답을 구하며, CG 기술을 통한 아비규환의 스펙타클과 유머 감각으로 오락적인 쾌감의 극대화를 시도한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목표 아래, 이야기의 전개는 빠른 템포로 일관한다. 백두산의 4차 폭발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조인창 대위와 남한의 군인이 북한의 특수 요원 리준평을 포섭하고, 핵무기에서 분해한 핵탄두에 기폭장치를 설치한 뒤, 목적지인 백두산의 7번 갱도에 도달해 미션을 완수하기까지. 구국의 주역들이 북쪽으로 전진하는 며칠 동안, 답답하게 늘어질 수 있는 장면은 생략하고 재난 대처 방안의 이론적 설명은 압축한다.


영화의 문제는 진행 상에 꼭 필요한 내용까지 생략하고 압축하는 데 있다. 그로 인해 “백두산”의 전반적인 짜임새는 마치 스위스산 치즈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모양이다. 가만히 되짚어보면 당최 이해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다. 한강 대교에서 쓰나미를 정면으로 마주한 최지영은 어떻게 만삭의 몸으로 차량에서 탈출했고, 때마침 대피 버스의 탑승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북한 핵기지 앞에서 총격전 끝에 미군의 포로가 된 부대원은 어떻게 감시망을 피해서 조인창과 리준평이 숨은 마트에 구세주처럼 등장했을까. ‘어떻게’에 대한 답은 영화관의 불이 켜진 후에도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백두산”은 보다 긴 러닝타임의 감독판 버전이 시급해 보인다. 아마추어적인 실수가 곳곳에서 눈에 띄기 때문이다. 후반 편집 작업은 도중에 중단된 것 같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은 마치 로봇춤을 추는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논리적인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강남 테헤란로의 붕괴부터 본모습을 드러내는 CG는 생생함과 현장감보다 애니메이션의 흔적이 묻어나고, 그로 인해 위기 상황에서 배우의 리액션은 때로 생뚱맞다. 흔히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표현하는 재난 영화의 볼거리는 다소 진부한 설정을 관대하게 용서하도록 만들지만, 이는 “2012”, “투모로우”처럼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헐리웃 영화에 한정되는 얘기일 터이다.


창조적인 연출은 영화 매체의 기술적인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재난 장르의 매뉴얼을 답습하는 기획 영화에서 창작자의 고유한 목소리는 애당초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백두산”이 의존하는 것은 톱스타 이병헌과 하정우의 스타 파워이다. 두 배우가 펼치는 개그는 “극한직업”과 “엑시트” 같은 CJ표 언어유희의 연장선에 있다. 하정우의 “큐티쁘띠”, 이병헌의 “부럽냐(불없냐)”, “별다줄(별걸 다 줄이네)”, “지자(지X하고 자빠졌네)”. 듣는 순간 민망해지는 부장님 유머로 객석 곳곳에서 비웃음과 탄식이 흘러나온다.


영화의 톤은 극과 극이다. 마치 샤워할 때 중간점을 찾지 못하고 냉수와 온수를 오가는 것처럼, 코미디와 드라마의 어조는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버디 무비적 성격은 진지한 순간을 잉여처럼 보이도록 한다. 심각하게 묘사되는 리준평과 아내의 사연, 애국심으로 가득한 청와대 민정 수석과 강봉래 교수의 밀당, 3%대의 희박한 가능성에 배팅하는 컨트롤 타워와 타국의 주권 행사를 방해하는 미군의 갈등은 극 중에서 무기력하게 작동한다.


조연 캐릭터의 활용은 다소 소모적이다. 조인창의 심리적인 지지대인 최지영은 아이돌 가수 출신 여배우의 무미건조한 표정 연기와 발성으로 그렇다 할 개성을 포착할 수 없다. 천재 지질학자인 로버트 강봉래는 관료주의 시스템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의 서러움에 호소하지만, 미국을 단순히 정치적 악역으로 파악하는 영화의 일차원적 인식에서 그의 분노는 극히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화산 폭발로 인한 대규모의 지진으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지만, 그 와중에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흐릿해진다. 조인창과 리준평의 우애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의 화합이며, 둘의 관계는 상대에게 홀로 남게 될 혈육의 미래를 부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동지애로 나아간다. “강철비”, “공조”와 유사한 남북 협동-위기극복 영웅 서사에서, 주인공 조인창의 행동 동기는 모호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리준평의 손익계산을 포착하는 이병헌과 달리, 하정우는 캐릭터가 지닌 가벼움의 늪에 빠진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한 영웅의 주체적인 사명의식보다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의 마인드가 부각되는데, 과연 관객은 그의 심리에 충분히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을까.


형식적인 관점에서 “백두산”은 아마추어리즘의 산물이다. 순수하게 오락성을 추구하는 영화는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표방하지만, 헐리웃 영화의 껍데기만 빌려온 것 같다. 여기에는 창의적인 이야기도, 지성이 동반된 유머 감각도 부재한다. 허술한 스펙타클과 말장난으로 지루함을 방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지만, 여기서 ‘지루하지 않음’은 영화 매체의 본래적 즐거움과 먼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영화사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백두산”은 개봉 첫 주 46%에 가까운 상영관을 점유했다. 이는 한국 영화의 다가올 미래에 많은 바를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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