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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Jan 03. 2020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병헌


배우의 빼어난 연기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추석 연휴에 개봉한 “타짜3”에 만족하지 못한 관객들이 최동훈 감독의 “타짜”를 그리워하면서 곽철용의 찰진 대사 하나하나를 예수 그리스도가 남긴 최후의 말씀 같이 되새겼던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며 망각하고 지내지만, 배우의 연기는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크게 기여한다. 따라서 배우의 연기에 감탄하는 관객이 배우를 찬양하는 것은 합당한 일처럼 보인다. “묻고 더블로 가!”,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마포 대교는 무너졌냐?”, 뒤늦게나마 김응수에게 버거킹 CF를 선물한 네티즌들의 성원은 “타짜”의 매혹적인 순간에 대한 바람직한 응답이 아닐까.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영화인에게 감사의 악수를 청한다면 아마도 우선순위는 배우에게 돌아갈 것이다. “초록물고기”의 한석규, “우묵배미의 사랑”의 박중훈, “박하사탕”의 설경구,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 “올드보이”의 최민식, “밀양”의 전도연 … 한국에서 대배우로 존경받는 배우들은 저마다 대표작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연기, 이른바 명연기를 선보였다. 배우 이병헌 역시 그들과 동일선상에서 연결되지만 대표작을 딱히 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구별되는데, 이는 매 작품에서 그가 굴곡이나 기복 없이 꾸준하게 활약한 데 있다.



“팡세”에서 파스칼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고 했지만, 대중 미디어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영화 배우는 일반인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스크린 바깥의 현실에서 배우들은 매 순간 언행을 조심하며 대중이 그에게 몰입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반세기가 넘는 활동에도 티 한 점을 찾기 힘든 김혜자, 영원히 순수함을 간직할 것 같은 박보검. 그들의 맑은 이미지는 남몰래 실천하는 선행과 서로 맞물리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면, 이병헌은 이따금 갈대처럼 흔들렸다. 


세속적인 면모를 지닌 톱스타라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다소 예외적이다. 그의 이미지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배우 이병헌은 자연인 이병헌과 별개의 인격체로 간주된다. 배우 이병헌은 청룡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사 100주년 기념 연설을 맡는 대한민국 대표 연기자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인 이병헌은 굵직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낙인찍힌 채 대중의 눈밖에 난 상황이다. ‘연기로 이병헌을 비판할 수 없다’는 흔한 말은 ‘이병헌의 사생활은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함축한다.


사생활에서 큰 오점을 남긴 탤런트는 일정 기간 자숙의 시간을 갖는다. 폭력 사건에 연루된 가수나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스포츠 선수, 미투 운동으로 고발된 배우에게 공백기는 커리어에 치명상을 입힌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2014년 순간의 충동은 그를 나락으로 주저앉힐 수도 있었지만, 자숙의 시간은 장기간 지속되지 않았다. 한결같은 프로페셔널리즘은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고, 크게 휘청인 것 같은 궤도는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제자리를 찾았다. 


베트남의 정글과 같은 험난한 가시밭을 순전히 자신의 능력을 통해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의 재능이 얼마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그가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지, 새삼 한국 영화계의 지형에서 그의 좌표를 가늠해보게 된다.



KBS 탤런트 공채인 이병헌은 한국 사회에서 대중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90년대 드라마를 통해 데뷔했지만, 현재 비슷한 위치에 있는 배우들과 지나온 발자취를 달리한다. “비트”를 통해 일찍이 자유와 반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정우성, “태양은 없다”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주요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정재.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샐럽계의 대표적인 댄디인 그들은 흡사 고대 그리스 조각상 같은 아우라를 바탕으로 선과 악을 넘나드는 각양각색의 캐릭터에 도전해왔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형언할 수 없는 후광이 이병헌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후광은 어딘가 허술하다. 이때 ‘허술하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기보다 배우의 매력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뜻에 가까운데, 그는 이 허술함을 무기 삼아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나사 하나를 푼 채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동생과 어울릴 수 있었고, “내부자들”에서 모히또와 몰디브를 혼동할 수 있었으며,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DMZ에 매설된 지뢰를 밟고 북한군 앞에서 비굴하게 울먹일 수 있었다. 


그가 전공하는 분야는 진중함이나 무게감 또는 빈틈없는 완벽함이 아니다. 그러나 로맨스에 한해서라면 그는 독보적이다. 그는 로맨스에 최적화된 제반 조건을 타고났다. 아름다운 그의 외모는 친근하게 다가온다. 전유물인 달콤한 미소는 얼어붙은 분위기를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아내리게 한다. 램브란트의 초상화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는 주위를 장악한다. 내레이션에서 탁월한 저음역대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운 신뢰감을 형성한다. 바로크의 세계와 로코코의 세계가 공존하는 마스크는 조말론 컬렉션처럼 은은하고 품격 있는 향을 풍긴다.


1895년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 이후 영화의 역사에서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남성 배우는 다수였던 한편, 커피 한잔을 함께 마시고 싶은 배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병헌은 프랑스의 알랭 들롱, 이탈리아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헐리웃의 로버트 레드포드, 리처드 기어와 유사한 로맨틱 가이로 분류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우등의 유전적 형질을 타고난 남성은 이병헌보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 잡힌 비율을 갖고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와 유사한 분위기를 타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병헌의 로맨틱은 영화를 관할하는 신이 그에게 선물한 기적 같은 축복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보스(김영철)는 조직의 해결사이자 가장 아끼는 오른팔 선우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는 왜 그토록 가혹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부하의 판단 착오가 자비를 베풀 수 없을 정도로 모욕감을 주었던 걸까. 그 내막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지만, 답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보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여자 친구를 보디가드 했던 선우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수줍어했다. 스튜디오 건너편에서 연주하는 그녀를 향하는 불꽃같은 시선은 보스의 입장에서 응징당해 마땅한 것이었다.


1973년 미국의 영화 평론가 폴린 케일은 고전 헐리웃 배우 캐리 그란트의 마법을 분석한 바 있다. 영화 속 그는 여타 조연 캐릭터와 엑스트라를 대할 때 비지니스적인 태도로 정중하고 신사답게 행동하지만, 캐서린 햅번이나 아이린 던(Irene Dunn)이 연기하는 여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면 남몰래 감추어 둔 부드러움과 자상함을 펼쳐놓는다는 것이다. 파트너와 함께 하는 그 순간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캐리 그란트처럼, 이병헌도 여배우 앞에 설 때면 그만의 노하우로 오직 그녀만을 위한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2006년 멜로 영화 “그 해 여름”에서 그는 봉사 활동을 위해 시골로 내려온 순수한 대학생 총각이었다.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듯, 고개를 꼿꼿이 세운 이파리는 새파랬고 나뭇가지 뒤에 숨은 종달새는 사방에서 합창했다. 신비로 가득한 산골 집 마당에서 히로인 수애는 때마침 체조를 하고 있었다. 운명처럼 뒤에 서게 된 그는 우두커니 그녀의 크림빛 피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통해 관객은 직감할 수 있게 된다. 완전히 사로잡힌 그의 영혼이 영원토록 그녀의 곁에서 머물 것임을.


이병헌의 눈빛은 여주인공 앞에서 유독 간절해 보인다. 이정재와 정우성, 장동건과 원빈, 강동원과 정해인도 소유하지 못한 이 간절함은 그의 로맨스를 완성한다. 여배우와 단 둘이 등장하는 한 장면에서, 그는 구태여 본인의 멋을 뽐내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을 자제하고, 허당처럼 설렘으로 흐트러진 내면을 내비치면서 여배우를 돋보이게 한다. 그를 흐트러지게 한 여인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어 어깨를 으쓱하게 된다.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비 내리는 어느 오후, 우산 속으로 파고든 이은주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마치 전신이 마비된 것 같았다. 광대와 임금, 1인 2역을 맡았던 “광해”에서 벚꽃을 등지고 먼 곳을 가만히 응시하는 중전을 훔쳐보며 같은 반응을 보였고,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약속했다면서요. 평생 중전 곁을 지켜 주겠노라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잡은 손, 놓지 않겠노라고.” 이병헌이 약속하는 사랑은 음흉한 마음으로 가득 찬 악마의 불장난이나 음탕한 상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세속적인 틀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감성과 이성이 조화된 완벽한 사랑의 가능성이며, 어쩌면 평생 한번 있을지도 모르는 황금빛 사랑을 암시한다.



영화배우를 바이올린 악기로 말한다면, 단연컨대 이병헌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해당될 것이다. 바이올린 최고의 명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풍부한 사운드와 감미로운 음색으로 연주자의 부족한 기술을 상쇄시키는 것처럼, 이병헌은 짐짓 단조로울 수 있었던 작품에서 즐길거리를 보다 다채롭게 했다. 그가 출연했던 오락 영화는 그의 존재를 통해 정서적으로 한 뼘 더 풍요로워졌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손가락 귀신을 쫓는 악당, “마스터”의 언변으로 사람을 홀리는 사기꾼, “백두산”에서 우정과 대의를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는 북한 요원까지. 종종 아쉬움만 한가득인 작품에서도, 관객은 언제나 작품 속에 그가 있음에 감사했다.


이병헌은 뭇 남성들에게 시샘의 대상이다. 남자라면 한 번쯤 그의 외모로 하루를 보내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귀족적인 풍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그의 인상은 한편으로 서민적인 측면 역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미슐랭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와 와인이 그에게 잘 어울리지만 새마을식당의 김치찌개와 삼겹살도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인다.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인상을 바탕으로 그는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때로 그의 도전은 인간의 원초적인 영역에 다다르기도 했는데, 최민식과 함께 투혼을 불살랐던 “악마를 보았다”에서 그는 연쇄살인마를 잡았다 풀어주길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광기로 변질된 복수심과 상대를 갖고 노는 가학적인 쾌락은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통해 스크린에 서서히 물들어갔다. 


이병헌은 그를 대체할만한 다른 배우를 떠올리기 힘들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만약을 생각하게 만드는 배우이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드라마 “아이리스”는 과연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한류 열풍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한국에서 생소한 무협물인 “협녀”에서 만약 권력에 눈이 먼 그의 야욕이 없었다면 무엇이 남았을까. 기러기 아빠의 비극인 “싱글라이더”에서 만약 그가 시드니 주택가를 온종일 서성이지 않았다면, 가족에게 무심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이 그렇게 호소력을 지녔을까. 


극장의 짙은 어둠 속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흔히 잠자리에서 꿈을 꾸는 것과 비교된다. 영화가 꿈이라면, 이병헌이 출연하는 영화는 사랑의 꿈일 것이다.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사랑의 꿈”의 멜로디처럼, 이병헌이 펼쳐내는 희노애락은 챗바퀴처럼 돌고도는 일상에서 메말라버린 감성을 단비처럼 촉촉하게 적셔준다. 훗날 한국에서 이병헌의 뒤를 잇는 배우가 등장할 수 있을까. 그처럼 근면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스크린에서 연애의 애틋함을 전하는 로맨티스트가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만약 이병헌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찾아온 단 한 번의 행운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그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https://youtu.be/Vg6UY_5fS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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