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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Feb 02. 2020

남산의 부장들, 속 빈 강정 같은 느와르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에서, 군부 독재 정권은 마치 샌드백과 같았다. “효자동 이발사”, “살인의 추억”, “변호인”, “화려한 휴가”, “택시 운전사”에서 시민의 기본권을 탄압하는 풍경은 일상처럼 그려졌고, 창작자의 목소리는 시대의 비합리성을 지적했다. 광기와 비이성으로 규정된 1970~80년대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일종의 영화적 관습이었다면, 2020년 “남산의 부장들”은 현재에 드리운 과거의 그림자가 다소 옅어졌음을 실감하게 한다. 1979년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우민호 감독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자제하며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발생한 사건과 그 내막을 장르 영화의 배경 무대로 활용한다. 


전작 “내부자들”과 “마약왕”에서 사람 사이의 우정과 배신에 주목했던 감독은 유신 정권 말기 박 대통령과 중앙 정보부장의 관계를 살피며 느와르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연출의 지향점은 명확해 보인다. 10.26 사건이 발생하기 전 40일 동안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했으며, 그날 저녁 역사적 사건의 주체는 왜 오른손에 권총을 쥘 수밖에 없었는지, 연출은 그때 그 사람들의 속내를 시청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화면 구성이다. 주도면밀하게 짜인 시각적인 스타일은 1960년대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프랑스 범죄 영화를 참조한 것처럼 보인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안경과 정장, 담배와 라이터, 짙은 갈색과 회색 빛의 실내 인테리어와 소품은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빛과 어둠을 대비하는 조명은 1961년 혁명을 함께 이룬 동지에 대한 존경심과 배신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얼굴을 역동적으로 부각시킨다. 음악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의 고독을 적극적으로 대변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치 돌다리를 두드려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전개된다.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을 의식한 듯, 논픽션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픽션의 조미료를 첨가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정체성은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서 어중간해 보인다. 서사는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설명하는 부수 장치로 기능한다. 워싱턴 D.C에서 김규평이 박용각과 접촉한 이후로, 국제 정세 속 한국의 현실을 조언하는 주한 미국대사와 로비스트, 청와대 주변에 탱크를 배치하고 기세 싸움을 걸어오는 경호실장,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대통령과의 만남과 갈등은 그의 최종 결단에 영향을 미치는 단발적인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박 대통령과 김규평 역의 배우 이성민과 이병헌은 모호한 인물의 내면을 카메라 앞에 펼쳐낸다. 배우의 포커페이스는 안갯속 베일에 가린 진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지만, 영화가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다소 단조롭다. 상징과 은유법의 활용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한 연출은 배우의 표정 연기에 의존한다. 클로즈업이 주가 된 영화의 패턴은 특히 프랑스에서 추격전이 벌어진 이후 보다 심화된다. 비 오는 밤 가택에 침입해 대통령의 대화를 도청하고 부산 상공에서 부마항쟁을 지켜보며, 헬기 탑승 명단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는 등, 김규평의 심리를 제시하는 일련의 상황에서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20세기 초 무성 영화 시대부터, 배우의 클로즈업은 결정적인 순간 극적인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면 “남산의 부장들”에서 그것은 동어반복의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김규평은 그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당한 채 외면당할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결단을 통해 꼭두각시 역할의 종지부를 찍는다. 극 후반 롱테이크로 제시되는 하이라이트에서, 히스테리적으로 폭발하는 분노와 허둥거리는 움직임은 한 시대를 종결짓는 사건이 개인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임을 내보인다. 40일에 걸쳐 축적된 감정이 그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과 별개로, 관객은 10월 26일 김규평의 심정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가족 관계와 과거, 일상 등 한 인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생활 영역의 요소들은 일체 생략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캐릭터의 활동 반경은 인물에 대한 이해를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한다. 


“남산의 부장들”은 장르 영화로서 극적인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데 무심하며, 시대물로서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이지도 않는다. 중반부에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교차 편집으로 전개되는 스릴러의 요소를 가미하지만, 이는 첩보물 장르의 클리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에 느와르적 조명을 비춘 것 같다. 소극적인 연출의 태도는 10.26 사건을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소모하며, 그 이상의 정치적인 또는 미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머뭇거린다. 구성적으로 덜 다듬어진 서사와 단조로운 영화의 패턴에서 남는 것은 기성 느와르 이미지의 겉멋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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