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맨더 지코와 옹호할 수 없는 인터넷 방송의 즐거움
방송인은 왜 올바르고 정직해야 하는가. 왜 바른말 고운 말 사용을 준수해야 하는가. 그동안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를 통해 모습을 비추는 연예인은 시청자의 평균적인 취향과 자신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감안해 타의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개인 방송 시대의 도래와 함께 방송인의 무결점에 대한 고정관념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방송인의 ‘도덕성’은 어느새 의무가 아닌 옵션이 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예능인 유재석이나 지석진처럼 선한 이미지를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타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녔다면 누구나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 누구나 방송인이 될 수 있기에, 그동안 TV 화면에서 만날 수 없었던 사회의 비주류 캐릭터가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매일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며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있다. 이 다채로움은 무궁무진한 개인 방송의 매력인 동시에 사람들이 그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언어의 마술사, 밤의 황제, 그리고 악의 축
BJ 커맨더 지코, 박광우는 인터넷 방송계에서 타노스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주로 20~40대 남성에게 유명한 그는 독보적인 방송 능력을 가진 만큼 원성을 사는 것도 독보적이다.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그는 스스로 건달을 자처하며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기성의 프레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아슬아슬한 수위의 폭언과 욕설, 외설적인 언사 없이 성립되지 않는 그의 방송은 ‘퇴폐’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데, 그는 퇴폐를 시청자에게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희극적인 장치로 활용한다. 과거 모 영화배우도 보고 현실 웃음 터졌다고 고백한 ‘키보드 샷건’이 그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종합 엔터테이너 커맨더 지코의 캐릭터는 신박하다. 21세기 크리에이터 대다수가 모던을 지향할 때 그는 복고를 선택했다. 그의 컨셉은 70년대 새마을 운동 시절에 유행했을 법한 한국형 마초, 꼰대를 패러디했다. 이때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수구성은 특유의 리드미컬한 말투와 융합된다. 짙은 눈썹과 두툼한 입술, 야무진 코가 빚어내는 험상궂은 인상과 180cm가량의 키, 듬직한 피지컬은 강한 남자의 퍼스널리티를 구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스스로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상남자’이다. 그러나 평소 행실은 대인배보다는 소인배에 가깝다는 반전이 있다.
“입만 열면 욕설, 비하 발언을 하는 BJ”. 한 뉴스 기사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주류 사회에서 커맨더 지코는 미풍양속과 도덕 질서를 해치는 악의 축으로 분류된다. 문제적 아웃사이더로 악명이 높지만, 신기한 점은 10년 가까운 활동 기간 동안 누구보다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폭넓지 않지만 적지 않은 팬층은 매니아적으로 마치 교주처럼 그를 추종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추종자를 끌어모으는 힘은 그만큼 특정 집단의 기호와 욕망을 저격하는 컨텐츠를 생산하는 데 있다. 그것은 해당 컨텐츠가 질적으로 얼마나 퇴폐성이 짙은 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위 문화인 개인 방송은 새로운 문화적 코드를 포용하며, ‘공공성’이라는 이념에 따라 표준화된 공중파 방송의 획일성을 극복한다.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0년 전에 누가 ‘먹방’이 오늘날 유행할 것으로 예상했는가. 단순히 ‘먹방’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눕방’, ‘잠방’ 같은 이전까지 생소했던 포맷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이 자리 잡았다.
나아가 어른들만 즐길 수 있는 ‘성인 전용’ 컨텐츠도 다양해졌다. 커맨더 지코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든다. 아프리카 TV에서 밤의 황제인 그는 한국식 술자리 문화, 유흥 문화를 자기만의 토크쇼 스타일로 재해석한다. 월화수목금토일, 술술…술먹방으로 진행되는 그의 토크쇼는 독설을 앞세운 MBC 예능 “라디오 스타”와 유사한 패턴으로 시청자의 속된 호기심을 속속들이 만족시킨다. 지치지 않는 달변가인 그는 흡사 MC 김구라의 하드코어 버전과 같다.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게스트와의 대화를 주도해나가며 굳이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상대의 약점을 직설적으로 공략한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상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기상천외한 애드립으로 상대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해 전복적인 쾌감을 산출한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망나니
TV 공중파 방송과 구분되는 개인 방송의 큰 특징은 크리에이터와 시청자 간 ‘실시간 소통’일 것이다. 매일 밤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사이와 다름없기에 시청자는 방송이 종료된 후 비제이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고 비제이도 당연하다는 듯 털어놓는다. 문제는 연애처럼 은밀한 사생활에 대해 비밀 유지가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스트리머는 여기서 벽을 마주한다. 하지만 커맨더 지코는 발상을 전환했다. 모두가 한계라고 생각하는 지점을 오히려 기회로 삼는다. 방송이 꺼진 후 자신의 일상을 모두 시청자에게 보고한다. 상대가 노크하기 전에 먼저 문을 활짝 열어 공개한다. 따라서 시청자와 그의 관계는 너나들이하는 친구 사이를 초월해 도원결의로 맺어진 의형제 관계에 이르게 된다.
삶은 마치 아무리 길어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무궁무진한 소재를 지니고 있다. 방송이 삶이 되고 삶이 방송이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올라선 그는 삶의 모든 것을 희화화한다. 동료, 친구,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평소 지인들과 주고받는 카카오톡 메시지, 한 달 동안 쿠팡에서 구매한 물건, 돌잔치 행사의 축의금 내역 등, 생활 속 작은 부분 하나까지 약간의 뻥을 섞어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심지어 위기에 봉착한 그의 부부생활까지도 시트콤 형식으로 화면에 내보인다. 삶과 방송의 경계를 지운 그의 방송은 흡사 생방송 인간 극장을 보는 것처럼 리얼리티로 가득하다.
물론 커맨더 지코는 오늘날 인터넷 방송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크게 기여했다. 인터넷 방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지도발에 버금가는 규모의 비하 발언,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정치적 성향,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외설적 언사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누구도 옹호할 수 없다. 그건 그의 친족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일상화된 그의 경거망동을 비속하고 저속하며, 상스러운 행위로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망나니의 존재는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시청자에게 일탈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사회생활에서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모습을 위장하는 것은 미덕으로 권장된다.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일상화된 분위기에서, 생존을 위해 반강제로 쓸 수밖에 없는 가면은 자신에 대한 억압으로 기능한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할 수 없지만, 이 희대의 망나니는 모두가 쓰는 가면을 과감하게 집어던진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눈 앞에 존재하는 모든 허례허식을 낱낱이 까발린다.
시청자에게 웃음을 제공하기 위해 최소한의 자존감도 포기한 인간을 보는 것은 일종의 해방이다. 규범과 상식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유부남인데도 밤이면 밤마다 강남역에서 방황하는 그는 술자리에서 미모의 여성 게스트가 곁에 있으면 정신을 못 차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게스트에게는 대놓고 면박을 준다. 별풍선을 거하게 선물 받으면 비록 상대방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릴지라도 재빠르게 태세를 변환한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상남자의 자존심은 모두 내던지고 귀염둥이가 되어 재롱을 부린다. 내면의 속물근성을 뻔뻔하게 내세우며 일말의 가식을 부정하는 태도에는 분명 거짓됨이 없다. 동시에 그의 솔직함은 모든 가식이 증발된 후 적나라한 욕망만 남은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공허하고 황폐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선구자 or 속물
인터넷 방송과 관련해 한 가지 의아한 점은 한쪽으로 치우친 여론에 있다. 노골적으로 상업성을 추구하는 개인 방송은 선정적인 성격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모든 자극적인 방송이 인기를 끄는 것은 아니다. 서로 엇비슷한 구도에서도 방송인 나름대로 차별화를 시도한다. 차별화의 과정에 일종의 창조적인 정신이 개입한다. 크리에이터에게 이는 고유한 스타일의 기반이며, 모방할 수 없는 오리지널리티의 바탕이 된다. 이때, 방송에 투입되는 개인의 노력과 열정은 고착화된 대중문화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개인 방송이라는 하위문화는 과거에는 수용할 수 없었던 개개인의 특별한 취향을 반영한다. 인터넷 방송의 자유로움과 타고난 쇼맨쉽의 접점을 찾은 커맨더 지코는 사회 통념상 텔레비전 화면에 당당하게 내보일 수 없었던 어른들의 세계를 방송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그의 방송은 공개적으로 내보일만한 풍경이 아니기에, 이는 일종의 위악인 동시에 하나의 도전이다. 그의 독창성과 퇴폐성은 그의 도전 정신에서 함께 유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일반인의 시선으로 볼 때, 내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내보인 망나니는 천민자본주의란 시대정신이 빚은 사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해서 정착시킨 선구자? 아니면 넘지 말아야 선을 넘은 속물? 과연 방송인으로서 그의 노력은 후세에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