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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Oct 03. 2022

09/30 서울시향 공연 감상

지휘 : 유카-페카 사라스테 / 오케스트라 : 서울시립교향악단 / 협연 : 제임스 에네스


1부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은… 잘 모르겠다. 먼 옛날 타국에서 마이클 틸튼 토마스/레오디나스 카바코스 조합으로 처음 들었을 때도 당최 무얼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는데 이번 공연도 대략 난감하기만 했다. 다만, 앵콜 바흐 소나타에서 난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었다. 악기로 천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제임스 에네스는 이제 바이올리니스트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예술적 경지에 올라섰구나. 따스한 음색은 휴머니즘을 표상했으며, 셈여림은 0.01mm 단위로 조절하는 듯했다. 나는 비루투오소의 심후한 내공에 짓눌린 채 거제도 해녀가 된 것처럼 한동안 숨을 참고 있어야만 했다.


2부


  첫 음부터였다. 북유럽풍의 웅장한 예술혼이 콘서트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트럼펫과 플룻, 호른이 차례대로 주제를 읊조린 후 첫 투티에서 본색이 드러났다. 트럼본을 필두로 한 금관 군은 점심 반찬으로 민물장어를 먹었는지 종횡무진 호쾌한 기상이 돋보였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악기와 현악기의 유니슨은 마치 옆집의 부부 싸움을 보는 것처럼 살벌했다. 좌중을 압도하는 이 맹렬한 기세는 스케르초와 피날레까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은 불완전해 보이는 작품이다. 1877년 12월 작곡가가 야심 차게 준비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작곡가는 수차례 개정을 거쳤지만 교향곡의 형식적인 결점에 대해 전문가의 많은 지적이 있었다. 클라이맥스가 일찍 등장해 에너지를 소모한다거나, 특정 악절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된다거나, 뜬금없는 휴지(pause)로 인해 전개가 부자연스럽다거나, 하는 비판들. 대체로 공감이 간다. 이런저런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곡을 찾게 되는 것은 빈티지 와인처럼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은 악상들이 넘실대는 데 있을 터이다.


  1악장의 2주제가 그러했다. 브루크너 전매특허, 셋잇단 음표로 펼쳐지는 바이올린의 주제는 김연아의 올림픽 더블 악셀처럼 유려하게 표현됐고, 대위 선율들은 여기에 속속 합류하여 오색찬란한 무지갯빛 장관을 수놓았다. 2악장 ‘안단테 콰시 알레그레토’ 템포에서 비올라의 노래는 일품이었으며, 감미로운 패시지들은 더블 베이스의 지속음, 싱커페이션, 목관의 합창과 번갈아 하나 되어 품격 있는 예술로 승화되었다. 이 순간은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이 팔당호에서 만나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로 합쳐지는 현장을 목격하는 듯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조차 공연에서 작곡가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특히 초기작은 자칫 잘못하면 청중에게 고문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외국 공연장에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도중에 퇴장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다. 그런데 이토록 까다로운 작품에서 이토록 격조 높은 하모니로 내 마음을 움직이다니. 사라스테는 리허설에서 대체 무슨 마법을 시전했단 말인가. 때로 휘청이는 앙상블과 관악기의 잦은 실수가 내 짧은 인내심을 시험했지만, 오케스트라의 열연에 정신이 혼미해져 여기가 서초인지 드레스덴인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공연은 그저 놀라웠다. 이 서프라이즈는 뭐랄까.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날 저녁 여수 리조트에서 여자친구가 나 몰래 준비했던 깜짝 란제리 패션쇼가 문득 떠올랐다. 그 정도였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수준의 음악에 입은 쩍 벌어졌고 눈은 휘둥그레졌다. 현장에서 생생했던 악기소리의 질감은, 브루크너 교향곡에 대한 나의 이해를 더욱 심오하게 했다. 무심하게 흘려듣곤 했던 플룻의 짧은 프레이즈가 이렇게 탐미적일 수 있다니. 총주의 아티큘레이션이 이렇게 대쪽같이 처리될 수 있다니. 시작과 피날레가 연결되는 수미상관 구조가 이렇게 절묘했다니!! 이게 바로 클래식 음악을 공연장에서 듣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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