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의 데뷔작은 생선회에 비유할 수 있는데, 보통은 삭아있지만 운이 좋은 경우 그 빛깔에서 생기를 발견할 수 있다. 난 모든 영화감독의 데뷔작에 갓 쳐낸 광어 같은 싱싱함이 장면마다 깃들어 있기를 기대한다. 마틴 스콜세지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첫 장편 영화에서 감지했던 것처럼, 다소 거칠지라도 예사롭지 않은 기백은 앞으로 감독의 싹수를 점치게 한다. 비록 구성적으로 통일되고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재능을 보여주는 첫 연출은 새로운 느낌으로 충일되어 꿈틀거린다. 신혼 첫날밤 새신랑의 기력을 연상시키는 정제되지 않은 과잉은 지켜보는 사람을 긴장시킨다.
<레이디 버드>에서 첫 단독 연출을 맡은 그레타 거윅은 자신의 감각으로 스크린에 모던함을 불어넣는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앨라니스 모리셋, 데이빗 매튜스의 팝 넘버 선곡은 2000년 초반 10대 청소년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데 일조한다. <레이디 버드>는 여성 감독이 바라보는 사춘기 소녀에 대한 드라마이다. 여성이 묘사하는 여성이기에 주인공의 모든 제스처에는 활기가 넘치는데, 이는 창작자의 자전적 경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감독의 시선은 폭넓다. 그것은 10대의 첫사랑, 사회 부적응, 방황 같은 특정한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감독의 시야는 주인공의 일상과 그 주변부까지 포괄하며, 사춘기 10대를 둔 일반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을 조명한다.
2002년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하는 <레이디 버드>의 주요 테마는 삶의 조건으로서 가족의 사랑과 소녀의 정신적 성장이다. 기독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자의식 강한 17살 소녀 크리스틴은 자신이 자신에게 지어준 ‘레이디 버드’라는 별칭을 사용하며, 새크라멘토의 철길에서 후진 쪽에 자리한 집(the wrong side of the tracks)에서 벗어나는 것이 꿈이다. 여느 모녀처럼 크리스틴과 엄마는 날 선 관계에 있다. 엄마 매리언은 크리스틴을 현실로 끌어내리려 한다. 그녀는 크리스틴이 자기 주제를 깨닫길 바라지만, 엄마의 뜻을 따르기에는 자기 삶의 가능성을 믿고 사랑하는 크리스틴의 야심이 지나치게 크다. 둘은 대학 진학 문제로 갈등한다. 매리언은 집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지역의 데이비스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딸의 생각은 다르다. 레이디 버드는 꿈의 도시, 문화의 도시인 뉴욕에 위치한 대학으로 진학하길 희망한다. 엄마의 반대에 부딪힌 레이디 버드는 엄마 몰래 아빠와 일을 꾸민다. 대학 진학 문제 한편에는, 레이디 버드의 사적 이야기들이 있다. 그녀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극 동아리 활동, 유쾌한 학교 생활, 첫사랑과 이별, 첫 키스와 첫 경험 등 사춘기의 통과 의례를 모두 치른다. 이 과정을 통과한 레이디 버드는, 레이디 버드의 허물을 벗고 점차 크리스틴으로 자리 잡는다.
파트너 노아 바움백 영화(<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시나리오에 참여하면서 오랜 기간 단련해 온 재기 넘치는 그레타 거윅의 유머 센스는 영화 종반까지 유지된다. 그 감각은 현란한 대사에서 나타나는데, 재치 있는 일상의 언어는 모두 크고 작은 효과를 지니며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한다. 특히 매리언과 크리스틴 모녀가 주고받는 라인은 코미디의 긴장을 배가시킨다.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매리언은 팩트 폭행으로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고 이에 지지 않으려는 크리스틴의 리액션도 무척이나 기가 세다. 보헤미안 카일의 신도 잊을 수 없다. 그가 핸드폰을 추적 장치로 정의하며 핸드폰 소지가 갖는 부작용에 대해 설파할 때, 그 허세는 작가의 삶에 대한 관찰력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상업 영화에서 코미디는 1차원적 슬랩스틱과 동의어이기에, 그레타 거윅의 대사 감각을 보다 부러워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유머의 구성 요소가 등장하는 타이밍과 이를 끊는 편집은 코미디 장르에서 핵심이다. 전혀 웃음을 유발하지 못하는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둘 중 하나가 어긋나 있다. 90년대 로맨틱 코미디 레전드 맥 라이언이 주연했을지라도 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좋아하지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노라 애프론 영화의 유머 타이밍은 늘 미적거리기 때문이다. 실패한 코미디 영화는 대개 써먹은 유머를 2절 3절 반복하며 질질 끌면서, 좀 끊었으면 하는 시점에 가위를 들이대지 못한다. <레이디 버드>의 코미디 타이밍은 근래 영화 중 가장 인상적으로, 이는 영화를 각별하게 만드는 주요소이다. 편집 감독 Nick Houy는 간결한 잽처럼 조크의 요점만 던지고 리액션을 짧게 처리한 뒤 점프 컷을 활용해 신을 종결짓는다. 숙고된 편집의 빠른 화면 전환을 통해 조크의 여운은 휘발되지 않는다.
크리스틴의 온갖 감정 변화에도 스크린 속 세상은 정감이 넘친다. 새크라멘토를 고향으로 하는 감독의 향수에 기인하는지, 풍경 쇼트와 인물의 배경에 담기는 새크라멘토는 늘 한적하다. 낮에는 매일같이 햇빛이 내리쬐며, 밤에는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인다. 등장인물 누구도 날씨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 변화 없는 도시에 대한 레이디 버드의 지루함, 그리고 말미에 크리스틴의 새크라멘토의 아늑함에 대한 그리움, 이 양가적 정서에 모두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자연적 조건과 맞물려 부드러운 인격을 지닌 사람들의 여유가 도시를 감싸고 있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심 깊은 인간들의 긍정성은 영화의 어조를 다듬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등장인물 모두에 몰입할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의 아버지가 지난 몇 년간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했으며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인 부침에도 레이디 버드의 꿈을 밀어주고, 가족 앞에서 흔들림 없는 태도를 유지하려는 인내를 보며 감탄했다. 겉은 매정한 척 하지만 아들의 여자 친구가 혼전 섹스를 이유로 집에서 내쫓겼는데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어머니에게도 모성애적 따스함을 느꼈다. 캐릭터에 사실성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배우의 표현력이 한 몫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그레타 거윅의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진정한 ‘인간’의 형상을 갖는다. 어떤 등장 인물도 선과 악으로 섣불리 분류할 수 없다. 영화 속 크리스틴, 부모, 소꿉친구, 남자 친구 등 모두에게서 우리 자신의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청소년에게는 그 시절의 꿈과 희망이, 어른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 있다. 마치 톨스토이 소설의 전지적 시점이 선입견 없이 심리를 묘사하며 삶의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는 것처럼, 그레타 거윅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사춘기 소녀를 둔 한 가정의 전체적 상황을 포착한다.
주인공 역을 맡은 시얼샤 로넌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배우로서 그레타 거윅을 즉각 떠올리게 된다. <프란시스 하>에서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그레타 거윅처럼 시얼샤 로넌의 연기도 같은 방식으로 조율되어 있다. 즉흥 연기가 아니지만,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는 연기는 생동감으로 넘실거린다. 시얼샤 로넌의 크리스틴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속을 그대로 내보인다. 크리스틴의 미성숙은 영화적 맥박의 원동력이다. 역동적으로 스케치된 레이디 버드의 무모함을 통해, 레이디 버드의 온갖 제스처는 풋풋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성교육 수업에서 그녀가 낙태에 대한 교사의 설명에 막말로 대들고 정학 맞을 때,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에서 생기는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학교 디너파티 중 대니와의 댄스에서 조금 거리를 두라는 수녀 교사의 충고에도 가슴을 밀착하는 것과 첫 키스 때 레이디 버드가 몸이 달아 주체하지 못하고 거머리처럼 엉겨 붙는 것을 카메라는 정면에서 바라보는데, 이때 기분 좋은 낯섦은 시선의 대상으로서 여성 대신 벅차오르는 설렘과 함께 내면 속 욕망을 적극 앞장 세우는 소녀를 마주하는 데서 발생한다.
드라마는 레이디 버드에게 찾아온 정신적 위기를 가족의 사랑이 치유할 때 최고조에 다다른다. 그레타 거윅은 중산층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상처받은 여린 존재가 보호받는 과정을 한 사례로 제시한다. 보헤미안 카일에 반한 레이디 버드는 그의 방에서 그와 첫 섹스를 하지만, 관계는 오르가즘 없이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레이디 버드는 첫 섹스를 동화 속 공주와 왕자처럼 서로에게 순결을 선물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카일은 순결한 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멘탈은 붕괴된다. 관계 뒤 카일은 침대에 누워 무심하게 늘 읽던 책을 읽는다. 레이디 버드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와서 1층 거실 의자에서 낮잠 자는 카일의 아버지를 쳐다본 뒤 집 밖으로 나와 잔디밭에 버림받은 듯 홀로 앉아있는데, 이 흐름은 무너지는 사춘기의 방어 기제에 대한 완벽한 묘사이다. 우리는 이 시퀀스를 보며 순수한 믿음이 철저하게 무너져 정신적으로 발가벗겨질 때의 충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카메라의 시선은 미성숙한 자아의 로맨틱한 환상이 깨질 때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 리얼리티를 입혀낸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 차를 타고 자신을 데리러 온 엄마의 품에 안겨 흐느낄 때, 엄마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토닥여준다. 둘은 영화 내내 티격태격하지만, 다툼의 표면 밑에는 의식되지 않는 정신적인 신뢰가 놓여 있으며, 이 신뢰는 사춘기 소녀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지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딸과 엄마의 정신적 유대로 견고한 드라마를 구축했던 사례를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셜리 맥클레인과 데브라 윙거의 <애정의 조건>(1983) 정도가 생각나지만, 심리 묘사의 세밀함에서 난 <레이디 버드>의 손을 들고 싶다.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그레타 거윅에 주목했던 미국 언론은 미국 영화계 내 여성 비율의 통계적 수치를 언급하며 90년 역사의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에 이름을 올린 5번째 여성 감독이라는 문구를 강조했다. 여성 감독의 희소성 문제는 물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뉴스거리이지만 감독의 영화적 비전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레이디 버드>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와 무관하게, 감독이 아티스트로서 코미디-드라마에 대한 감각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타 거윅의 재능은 지금과 같은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힘차게 진행되던 영화는 종반부에 조금 비틀거린다. 뉴욕으로 딸을 보낸 뒤, 딸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미안함에 공항으로 되돌아가며 눈물범벅이 된 매리언의 얼굴 쇼트는 지나치게 의도성이 짙다. 또한 뉴욕에서 한바탕 고생하고 난 뒤, 기숙사에서 엄마에게 남기는 메세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그럼에도 그레타 거윅은 소녀의 일렉트라 콤플렉스뿐만 아니라 인간의 넓어지는 이해의 폭을 때로는 좋은 문학처럼 담아낸다. 백마 탄 왕자님인 줄 알았지만 사실 게이였던 대니가 크리스틴이 일하는 카페로 찾아왔을 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대니를 크리스틴이 안아줄 때, 가끔 훌륭한 소설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인간에 대한 관용의 온기가 전해진다. 거의 모든 순간 <레이디 버드>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레타 거윅은 에너지를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지 잘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확신으로 가득 찬 연출의 젊음을 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 <레이디 버드>는 출발선에 선 모든 감독이 바라는 결과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