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현기증(Vertigo)>과 Bernard Herrmann
히치콕의 영화 중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싸이코>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현기증>을 꼽을 것이다. 아름다운 한쌍의 남녀가 가진 비밀과 속임수, 그리고 서스펜스로 점철된 비극적인 로맨스를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나는 <현기증>이 가진 마력에 완전히 굴복당했다. 배우들의 걷는 방식까지 따로 지시했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던 히치콕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의도한 크고 작은 장치들과(이를테면 Vertigo Effect) 큰 의미가 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장면 장면들의 파편은 나를 꿈을 꾸는 듯 어지러운 혼란의 세계로 안내했고, 스카티와 주디의 서로를 향한 편집증적인 사랑은 나의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수많은 매력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버나드 허먼이 작업한 사운드 트랙으로, 그의 음악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이 복잡한 영화를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은 영화 음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작곡가로 <현기증> 외에도 <싸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히치콕과 협업했다. 그 외에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현대 영화의 마스터피스로 남아있는 <시민 케인>, <킬 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Twisted Nerve"가 삽입되었던 <트위스티드 너브>의 사운드트랙 등이 있다.
영화 <현기증>의 사운드트랙 중에서도 다음의 두 곡을 소개하고 싶다.
Prelude And Rooftop
킴 노박의 눈동자가 점점 클로즈 업 되면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하학적인 모양의 그래픽이 소용돌이치듯 돌아가는 이 의미심장한 타이틀 시퀀스에 삽입된 곡은 Prelude And Rooftop로, 내가 <현기증> OST 앨범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트랙이다. (트랙 #1)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의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서 상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혹은 직후에 이어질 스카티의 불운한 사고를 암시하는 듯 불안한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이 곡은 나로 하여금 "현기증"이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전환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끔씩 기분이 내킬 때마다 위의 타이틀 시퀀스 만을 감상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히치콕과 허먼의 시너지 공격은 나에게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진짜 마법사들이 아닐까, 이 사람들?
Scene D'Amour
스카티는 매들린이 종탑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이후 그녀와 꼭 닮은 주디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지만 잃어버린 사랑으로 인한 상실감이 이미 그를 정서적 불안정 상태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새로운 연인의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하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급기야 주디에게 매들린을 닮은 헤어 스타일과 의상을 강요하면서 그녀를 통해 잃어버린 옛사랑과의 재회를 꿈꾸는 듯한 편집증적이고 도착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스카티를 사랑하는 한편 그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주디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고, (죄책감의 원인은 스포일러*) 마침내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스카티의 앞에 등장하는 주디와 그런 그녀에게서 옛사랑을 겹쳐보며 마침내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낀 스카티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 Scene D'Amour이다. (트랙 #15)
그리고 Scene D'Amour의 선율은 비이성적인 집착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두 남녀의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매개체이다. 개인적으로는 허먼이 히치콕과 함께 작업하여 남긴 결과물 중 가장 탐미적인 매력을 지닌 명곡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