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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Kim Jun 05. 2020

[궁금한 사람] 황석희

황석희는 영화 번역가다

황석희는 영화 번역가다. 외화 대사를 번역해 자막 만드는 일을 한다. 리얼하고, 가감없는 자막으로 관객들에게 미친 자막이라 불렸던 <데드풀> 황석희 번역가의 작품이다. 영화 자막은 외국어를 모국어로 바꾸는 단순 해석이나 독해가 아니다. 영화 스토리, 연출가의 의도, 캐릭터의 성격, 언어의 시대성,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등을 고려해 적합한 표현을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퍼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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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번역가는 어떤 작업을 하는 사람인가요?

A 영화 번역가는 영화 대사를 번역해서 자막으로 써요. 아주 드물지만 시나리오나 메이킹 필름을 번역하기도 하고요. 번역한 자막은 제작사나 연출가의 피드백을 받고 세부적인 표현이나 내용을 논의해 완성본을 만듭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완성본은 극장이나 영화사에서 관계자들과 함께 내부 시사를 하기도 해요.


Q 번역할 영화를 선택하기도 하나요?

A 영화를 골라서 받아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의뢰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작업해요.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정이라면 일을 거부하지 않고 받는 편이에요. 딱 한 편의 영화를 번역해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작디작은 작품이라도 번역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소중해요. 정말 의뢰가 밀려들 땐 못 하는 작품도 있는데, 의뢰 들어온 작품이 아무리 대작이고 번역료가 높더라도 기존 일정이 꽉 차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면 고사해요. 규모가 작은 영화들을 의뢰하는 수입사들은 제가 인지도가 없던 시절,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신 곳들이라 아무리 작은 작품을 의뢰한다고 해도 거절하는 일은 없어요. 삶에서 그런 의리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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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러셨잖아요. 영화 번역이 퍼즐과 같다고.

A 어드벤처 게임을 하다 보면 퍼즐을 풀어야 길이 열리는데 대개는 퍼즐이 아주 어려워서 이것도 만져보고 저것도 만져보고 이걸 여기 놨다가 저기 놨다가 그 상황 안에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퍼즐을 풀려고 시도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퍼즐이 풀리면 그 카타르시스가 참 중독적이죠. 영화 번역도 비슷해요. 하나의 문장을 두고 온갖 시도를 다 해봐요. 보통은 문장을 한 번 보면 어렵지 않게 자막을 쓸 수 있지만 고민이 필요한 자막이 정말 많아요. 그런 자막들이 퍼즐인 거죠. 그 퍼즐의 종류는 매번 달라요. 동음이의어로 말장난을 살려야 하는 조건의 퍼즐이냐, 기발한 단어 배치로 두 언어의 어순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조건의 퍼즐이냐, 한글 패치가 완벽하게 된 자막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조건의 퍼즐이냐. 어떤 퍼즐은 고민 중에 번뜩하고 떠올라서 한 번에 들어맞기도 하고, 어떤 퍼즐은 생각도 못 한 어떤 곳에서 힌트를 얻어 풀기도 하고, 어떤 퍼즐은 기계적으로 수십, 수백번을 공식 풀 듯 노트에 손으로 일일이 무식하게 써서 풀기도 해요. 그렇다고 모든 퍼즐이 반드시 풀리는 건 아니에요. 퍼즐에 두 손, 두 발 다 드는 일도 있는데 답답한 건 항복을 해도 퍼즐의 정답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 점만 뺀다면 영화 번역에서 자막 하나하나를 두고 고민하는 건 퍼즐 풀이와 굉장히 닮았어요.


Q 영화 번역 전에 영상 번역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A 맨 처음 번역했던 영상은 <닥터 필 쇼>라는 토크쇼였어요. 대사가 엄청 많고, 영상 번역이 처음이라 러닝타임 1분 작업하는데 2시간이 걸렸어요. 45분짜리 영상이었으니까 90시간이 걸렸죠…?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어요. 한 달을 그렇게 벌어도 속도가 이 지경이면 한 달에 20만원도 못 벌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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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러다 영화 번역을 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A 영화 번역은 영상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리그 같은 거예요. 대부분 영화 번역을 하고 싶어하거든요. 저도 그랬죠. 6년 가까이 계속 두드렸어요. 그 문을. 제 전화나 이메일을 안 받아본 영화수입사가 없을 거예요. 영상 번역 경력 4년차에 소개로 아주 작은 영화 한 편을 받게 되었어요. 규모가 작은 작품들은 번역료 때문에 경험이 좀 적은 번역가에게 맡기는 일이 있거든요. 2009년에 그 영화를 작업하고, 두 번째 작업한 영화가 2013년 <웜바디스>예요.


Q 그렇다면 <웜바디스>가 황석희 번역가의 존재를 제대로 알려준 작품인가요?

A 맞아요. 제 인지도는 <웜바디스>를 기점으로 조금씩 높아졌어요. 그 작품을 기점으로 개봉관 번역가로 일을 하게 된 거죠. 그 자막이 꽤 재밌다는 평을 들었거든요. ‘Bitches man…’ 이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이 자막에서 가장 많이 터졌어요. ‘매정한 년…’ 으로 나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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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많은 흥행작을 번역하셨는데, 그 중 스스로 생각해도 진짜 번역 잘했다! 싶은 자막이 있으세요?

A 아니요. 극장에서 보면 늘 뭔가 잘못한 것만 보여요. 번역가들은 100번 보면 100번 다 실수가 보여요. 기억에 남는 자막을 꼽으라면 <데드풀2>에서 “가족은 가좆이 아니야(Family is not an f word)”라는 대사예요.


Q 저 문장을 번역할 때 번역가님이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A 저 대사 자체도 번역이 어렵고, 말장난을 치면서 개그감을 살려야 하는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데드풀>의 대사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고 앙큼해야 해요. ‘Family is not an f word’ 가족은 가좆이 아니야라는 대사가 <데드풀2>의 핵심이라 몇 번이나 나오는데 대충 번역할 수도 없고요. 1편 자막이 재밌다는 평이 있던 상황이라 그 기대에 부응하려다 보니 부담스럽기도 했죠. 이거 제대로 못하면 나 망할 것 같은 느낌?(웃음) 바로 떠오르지 않는 대사는 계속 읽고 머릿속에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디어야 떠올라라’하는 심정으로요. 그래도 떠오르지 않으면 빈 종이에 적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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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막은 관객에게서 즉각적인 이해와 반응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이 어려울 것 같아요.

A 네, 자막은 글이 아니라 말이니까요. 


Q 번역가로서 갖춰야 할 요건 같은 게 있을까요?

A 언어를 대하는 감각은 너무 당연한 대답이고요. 꾸준함이 필요해요. 번역가의 삶이라는 건 프리랜서의 삶이기도 한데요. 지치지 않고 이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꾸준함이 반드시 필요해요. 두세 편을 끝내주게 번역하는 거야 어느정도 감각만 있으면 누구나   있는데요. 프로 시장에서 먹힐 수준으로 번역하는  아무나   있는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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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황석희의 웹 사이트나 메일을 통해 본인 번역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셨잖아요. 지금은 잠시 멈추셨지만. 불특정다수의 피드백을 받아보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궁금했어요.

A 제 번역에 도움이 돼요. 관객들과 수다 떠는 번역가가  뿐이고, 이게  강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현업에 계신 분들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도움 받는 게 가장 크고요. 결과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객과 이야기하는 건 제가 더 긴장하며 번역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예요. 제가 모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자막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신중하게 되거든요. 아, 다른 이야기인데 댓글에 욕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비속어가 많이 나오는 영화를 번역할 때 기발한 욕들이 필요했거든요. #지구의욕쟁이들아 #나에게힘을줘 이렇게 써서. 정말 온갖 욕이 다 올라오는 아주 쓸만한 자료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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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번역가는 연출가, 제작자와 긴밀하게 작업해야 하는 부분도 많겠어요. 연출가의 의도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A 연출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심령술사쯤 될 거예요. 번역가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능력 안에서 파악하는 것뿐인데요. 제가 가장 잘 쓰는 방식은 그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는 거예요. 평소 어떤 방식의 연출을 자주 쓰는지, 이번에도 그런 식의 연출이 있는지. 작품마다 자기 복제는 아니라도 자기 색이 많이 묻으니까요. 이것도 퍼즐이나 마찬가지예요.  장면과 대사 안에 연출가의 의도를 파악할 단서가 무엇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거예요.  굳이  단어를 썼나.  굳이 어순을 희한하게 뒤집었나. 아니면  대사를 하면서  소품을 쳐다보나 등등. 단서를 하나하나 꼼꼼히 뒤져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보이는  보일 때가 있어요. 가령 이번에 개봉했던 <젠틀맨>은 플레쳐라는 인물이 과거를 떠올리며, 주인공을 말할 때 ‘protagonist’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영화를 이야기할 때 보통은 main character란 말을 쓰지 protagonist를 쓰진 않아요. 그렇다면 굳이 저 단어를 쓴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죠. <젠틀맨>에서는 플레쳐를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나 그리스 희곡을 읊는 변사처럼 사용하고 싶었던 건데요. 딱히 대체어가 없어서 ‘주인공’이라고 자막을 쓰더라도 연출가의 의도를 파악해서 플레쳐의 어투를 변사처럼 희곡투로 쓰는 건 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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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수 아이유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음악을 업으로 삼고 나서는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듣고 마냥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늘 음악적 기술이나 보컬 등에 대해 분석하려고 한다’ 영화 자막 번역 작업도 비슷할 것 같아요. 외화 작품을 볼 때 마다 공부하는 기분이겠어요.

A 작품을 보고 감탄하는 것 같은 감상은 거의 없고요. 작품을 보며 문장을 해체하고 버릴 건 버리고 배울 건 배우려고 해요. 기존 번역가들의 기술을 훔치는 거죠. 누가 자막 번역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주지는 않으니까요. 아마 누군가는 지금 제 번역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배울 것 배우고 버릴 건 버리고 하고 있을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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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작가의 문체처럼 번역가에게도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나요?

A 번역가는 한없이 투명해져서 결국에는 자기 색을 없애고 원문만 남겨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저 말이 허울 좋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개봉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번역가들의 자막을 5분만 봐도 누구의 작업인지 맞출 수 있어요. 번역가 마다 조사나 어미의 사용법, 자주 쓰는 표현 등 스타일을 드러내는 단서가 많거든요. 그걸 작품마다 초기화하고 자기 색을 없앤다는 건 불가능해요. 자기의 스타일을 강점을 쓸 수 있게끔 연마해야죠. 성동일 씨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성동일 씨 연기 스타일이 있잖아요. 또, 번역가는 일종의 필터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원작자의 글이 필터를 통과해서 결과물로 나오는 건데요. 만약 그 필터가 새빨갛다면 최대한 물을 뺀다고 해도 어느 정도 빨간 물이 들겠죠. 가령 정말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진 번역가라면 부부간 존하대 설정을 무조건 아내만 존대하는 것으로 하겠죠. 이건 연출자의 의도와 무관한 설정이 될 수 있어요. 개인적 가치관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하지만 들어가기 마련이에요. 아, 이런 예시는 있을 수 있겠네요. 성소수자나 약자에 관한 표현을 자막으로 옮길 때, 벙어리 장갑을 ‘손모아 장갑’으로 쓴다거나 ‘엄지 장갑’으로 쓴다거나 하는. 이런 경우는 번역가의 가치관이 들어간 표현의 한 예가 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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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렇다면, 픽션 영화보다 다큐멘터리 같은 장르의 영화 자막 작업이 어렵나요? 보다 현실적이고, 시대에 맞춰 번역을 해야할 것 같아서요.

A 의외로 다큐멘터리는 고민이 많지 않아요. 단순히 팩트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라면, 문장에 최대한 건조하게 접근하면 되거든요. 그러나 픽션은 문장에 건조하게 접근할 수가 없어요. 가령 다큐멘터리에서 ‘이 연필은 제인의 조부가 쓰다 물려준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면 이건 사실이고 번역가의 해석이 개입될 여지조차 없어요. 그런데 픽션에 똑같은 문장이 나온다면, 단순히 문장의 일차적 뜻만이 아니라 배경이나 그 말을 하는 캐릭터의 의도를 추리해야 해요. 상황에 따라서 저 말이 거짓이거나 비아냥일 수도 있고, 어떤 심오한 의도가 들어간 대사일 수 있으니까요. 다큐멘터리에서 ‘Eat it’먹어라고 번역한다면 픽션에서는 그 장면의 상황을 단서로 먹어, 드세요, 처먹어, 처잡숴, 잡숴봐, 먹어라 좀, 안 먹어? 등으로 전개하는 게 가능하고,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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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겠네요.

A 영화에서 대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하나의 퍼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걸 꾸준히 해온 사람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즐기는 사람에게는 어떤 요령이 생겨요. 캐릭터의 표현 뿐만이 아니라 억양, 제스처, 눈빛이 맥락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때가 있어요. 혹은 장면 안에 있는 소품이나 음악, 소리일 수도 있고요. 이런 걸 몇 백 편씩 반복하면 비전문가 보다 맥락을 잘 파악하게 되죠. 완벽하다고 할 순 없고요. 어디까지나 경험에 의한 최선의 추리에 불과해요. 제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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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대적 언어(표현)라는 게 있잖아요. 예를 들어 최고라는 말이 짱, 캡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때도 있지만, 요즘은 그런 단어를 쓰지 않죠.

A 지금으로 친다면 오지다, 개쩐다 이런 거겠죠. 저는 유행어를 쓰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은 없어요. 과하지 않다면 상관없다고 보거든요. 시대에 맞는 자막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유행이 지나도 문장으로 유효한 표현들을 쓰려고 해요. 요새 나이 든 사람(꼰대)이 잔소리를 심하게 하면 아씨 짜증나 저 꼰대, 틀니 압수 라고 말해요. ‘틀니 압수’ 이게 유행어인데, 응용하면 틀니 2주 압수 뭐 이런(웃음). 이런 표현은 유행이 지나도 문장으로 유효하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라는 유행어도 있어요. 온라인에서 상당히 유명한 말인데요. 딱 맞는 상황에 쓴다면 저게 유행이 다 지나간 먼훗날에도 쓸 수 있는 표현이죠. 이런 것들은 편견 없이 잘 쓰는 편이에요. 유행어를 어거지로 넣어서 젊어보이는 척하는 자막은 최악이지만.


Q 언제부턴가 자막이 리얼해졌다고 느꼈어요. 비속어 사용도 조금 더 자유로워진 것 같고요.

A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아무리 과한 자막이든 유행어든 뭐든 일단 관객에게 먹히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해요. 안 먹히고 망하면 난리가 나지만요. <데드풀>이 충격적이었던 건 개봉관 영화 최초로 원색적인 비속어를 가감없이 뿌리다시피 했다는 거였어요. 성공한 쿠데타죠. 5년 전만 해도 썅, 씨발, 좆 같은 노골적인 비속어는 아주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외화계에서도 영화를 싸구려 말로 떡칠을 해놓는다고 수입사에서 질색팔색을 했어요. 이제는 영화에서 캐릭터가 상욕을 하는데 자막이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번역가가 너무 순화했다고 안 좋은 피드백이 오는데, 그런 관객들은 <데드풀> 이전 시대의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자막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대부분이에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의 자막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기준이 달라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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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관객 마음에 드는 자막과 번역가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막에 대한 지점이 다를 것 같아요.

A 예전에는 자막을 ‘입에 쓴 약’처럼 생각했어요. ‘관객들이 아무리 싫어해도 이게 옳은 자막이고 좋은 자막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그래서 관객에게 강요하는 거죠. ‘내가 전문가니까 잘 알아. 이게 좋은 자막이야.’ 라고.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요. 번역가들이 전통적으로 좋은 자막이라고 생각하는 포맷과 표현이 부질없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때로는 관객이 다소 길거나 어색하게 읽히는 자막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어요. 자막을 소비하는 관객이 그게 가장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자막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타협할 수 없는 개인적인 선은 있죠. 제 신조나 번역관에 관련된 것이요. 그걸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번역가는 과거보다 훨씬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Q 번역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관객이 좋아하는 자막이 좋은 자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계기가 있나요?

A 저는 제 영화든 다른 사람이 번역한 영화든 번역평을 찾아보거든요. 관객이 좋다고 옮겨놓은 자막을 유심히 봐요. 반대로 아주 싫었던 자막도 살피고요. 이런 것들을 보다 보니 제가 생각하던 좋은 자막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졌어요. 예를 들어 고유명사는 길이 때문에 다 빼고 번역했는데, 관객은 그것을 단서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자막에 넣어주길 원하더라고요. 그리고 자막이 조금 길어져도 뉘앙스까지 다 살려주는 걸 더 좋아하고요. 고유명사는 기니까 제외하고, 뉘앙스를 살리는 것보다 고유명사나 자막의 길이를 고려해 그동안 번역가들이 해왔던 것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거죠. 무슨 ‘영화 번역의 정석’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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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에  <롱 웨이 다운> 번역도 하셨잖아요.

A 정말 책 전체가 퍼즐이었어요. 책의 장르가 소설은 소설인데, 운문이거든요. 어떤 장은 전체가 다 라임이고, 어떤 장은 단어 배치로 가득인데 그걸 한국어로 살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제가 또 퍼즐광이잖아요. 오기가 들더라고요. 호기심도 생기고요. 그래서 덜컥 번역을 해보겠다고 했어요. 몇 개월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퍼즐 하나를 못 풀면, 하루 종일 머릿속에 그 조각을 넣고 다녀요. 밥 먹을 때도 씻을 때도 지워지지 않고, 무슨 아이디어 없을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요. Beef를 소고기와 안심 둘 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뭐가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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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혹시 표현을 수집하기도 하세요?

A 따로 적어 둬요. 대신 대단한 표현이 아니라 아주 흔한 것들이에요. ‘칠칠맞다’ ‘새초롬하다’ ‘가급적’ 같은 표현들이요. 반대로 영어로 생각했을 때 잘 안 떠오르는 것들. ‘주접 떨지 마’를 영어로 하면? 뭐, 이런 거죠. 정말 실용적이고 구어스러운 표현을 수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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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잘한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A 번역의 질은 오타 하나, 오역 하나가 나왔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캐릭터의 성격과 말하는 뉘앙스를 잘 살렸느냐 못 살렸느냐에 달렸죠. 번역은 단순한 독해가 아니거든요. 글이 아니라 말처럼 읽히는 자막, 읽기만 해도 캐릭터의 성격과 말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는 자막이 잘한 자막 아닐까요.


인물소개

황석희는 영화 번역가다. 자막을 만드는 일이 순수 예술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 못지 않은 창작의 고통을 겪으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적는다. 영화 자막을 만드는 일이 퍼즐과 같다고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퍼즐광이라 한다. 14년이 넘도록 영화 번역가로 활동한 황석희의 대표작은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이 있다. 최근에 번역한 영화 <젠틀맨>은 미친 자막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얼마 전에는 책 <롱 웨이 다운>을 번역해 한 편의 영화 같은 책 한 권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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