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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Oct 18. 2022

5. 노력했다고 다 결과가 나오진 않으니까

[출간 전 연재]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N잡 일지




N잡러로서 내 삶은 한 우물을 파다가 옆길로 새면서 시작되었다.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직장을 나온 뒤에는 다시 번역가 지망생으로, 늘 하나의 목표에 목을 매던 내가 어느 순간 ‘싫은 일을 피한다’는 추진력을 찾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생전 안 하던 짓을 저지른 것이다. 덜컥 사업을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콘텐츠를 만들던 그 무렵의 내게는 방향이나 결과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저 회사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일단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간절함에 몸을 바삐 움직였을 뿐이다.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 그때 팠던 우물들이 다음 단계의 바탕이 되었지만, 그래도 체계가 없고 들인 품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 N잡 이야기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든다면, 절박하면서도 투박했던 이 초반 시기는 공연의 서막쯤에 들어가지 않을까?     




본 막이 시작된 것은 책을 쓰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나의 우물 파기에 체계방향이 잡혔고, 조금씩이나마 노력과 성과의 균형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되는 대로 찔러보던 방식에서 결과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변화가 생겼고, 출발하는 시점부터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웠다. 나만의 규칙이 생기고 리스크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내 일상과 커리어에는 조금씩 안정이 찾아왔다.     


사실 ‘책 쓰기’라는 수단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내 개인적인 취향과 당시에 벌여놓은 일들이 한데 엮여 ‘책을 쓰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뿐, 만약 다른 물건을 만들거나 남이 만든 물건을 떼어다 팔거나 혹은 그 외에 어떤 길을 택했더라도 내가 일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안정적인 회사에 다닐 때조차 늘 미래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살던 내가 경험도 없는 데다 결과마저 불투명한 원고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했다. 글이라는 수단과 별개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일들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예전과 같은 극심한 불안은 더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이 극적인 변화에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마침내 내게 맞는 N잡의 활용법을 알아낸 덕분일 것이다.     




그 활용법의 핵심은 플랜 B에 있었다. 내게 주어진 우물의 개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건 단순히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일을 놓고 여러 길을 뚫는 것 또한 N우물의 특별한 강점이었다. 나는 독립출판이라는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이 진리를 깨달았다. 번역이라는 일을 놓고 고객에게 업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출판 같은 길을 뚫어서 직접 돈을 벌고 경력도 쌓을 수 있는 거였다. 전에는 고객을 잡는다는 한 우물에만 집착하며 그 우물이 터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실패라고 믿었다. 지금 보면 얼마나 미련한 생각이었는지. 그 사실을 깨달은 뒤로, 나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플랜 B에 해당하는 대안을 최소 한 개 이상 마련해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노력하면 결과가 나오겠지’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덤볐던 번역과 달리, 책을 쓰기 시작할 때 내 머릿속에는 기본적인 계획외에도 이런저런 상황에 대비한 예비 우물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원고를 써서 탄탄한 출판사에 투고를 하고, 그쪽에서 제작과 홍보 비용을 투자받아 종이책을 인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출간된 책이 어느 정도 팔려준다면 인세 수입과 더불어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자리도 잡고, 번역가라는 기존 우물과의 시너지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이 기대처럼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내 원고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한 군데도 없다면 번역서 때처럼 독립출판을 활용해서라도 어떻게든 책을 낼 생각이었다. 비용 때문에 종이책 제작은 어렵겠지만 전자책은 인쇄비, 물류비가 빠지는 만큼 마진이 크니 가격을 낮춰 잡아서 경쟁력을 만들기로 했다. 혹시 직접 출판한 책이 전혀 안 팔리더라도 일단 원고를 더 써서 전자책을 세 권까지는 만들어볼 계획이었다. 3이라는 숫자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그 정도 작업을 해보면 적어도 전자책 만드는 기술에 익숙해질 테고, 저서가 세 권이면 판매량과 관계없이 어딜 가서든 작가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전자책 제작 수업이든,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하는 글쓰기 강의든, 이 우물에서 파생된 기술을 가지고 또 다른 파이프라인을 뚫어볼 심산이었다.     




한 우물에 대한 집착을 버린 덕분에, 내게 책 쓰기라는 도전은 최선의 경우 수입과 인지도가 생기고 최악의 경우에도 기술과 경력은 남는 도전이 되었다. 낮에는 번역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보냈던 그 시간이 내내 평온했던 것은 내게 재능이 많거나 자신감이 넘쳐서가 아니었다. 그 낯선 평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줄 우물들이 있다는 확신이 엮여 만들어진, 어른이 된 후 처음 갖게 된 단단한 보호막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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