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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Oct 20. 2022

7. 직업이 몇 개냐고 물으신다면

[출간 전 연재]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N잡 일지





직업을 직업으로 만들어주는 기준은 무엇일까?     


한 사람이 하나의 우물만 파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비교적 명확했다. 어떤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쏟는 일이 그의 직업이었으니까. 회사에서 일과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은 회사원이고 가사에 가장 많은 힘을 쏟는 사람은 주부였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도자기를 구우면 도예가이고 일주일에 닷새 동안 학생을 가르치면 교사였다.     


그 외에 모든 활동은 ‘취미’라는 영역으로 뭉뚱그려졌다. 김대리가 퇴근 후에 하는 꽃꽂이나 수지 엄마가 아이를 재우고 하는 블로그는 직업이 아닌 취미였다. 어쩌다 그런 일이 발전하여 수입을 가져다준다 해도, 기껏해야 부업이라는 애매한 이름표가 붙을 뿐 본업과 동등한 직업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부업과 직업은 엄연히 달랐다. 부업이란 직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만 집중하고, 본업과의 충돌이 일어나면 우선적으로 그만두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주객이 전도되었다며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활동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통계청만 편한 기준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직업의 개수와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은 이제 업계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트렌드가 되었다. 심지어 엄격한 자격과 면허가 요구되고, 그렇기에 그 어떤 직업보다 높은 요새에 둘러싸여 있던 전문직 업계조차 더 이상은 N잡러의 유출과 침입을 막지 못하는 모양새다. 인기 웹툰을 거쳐 드라마로도 제작된 <내과 박원장>은 18년 경력의 현직 의사가 그린 작품이다. 국내 최대 플랫폼에 정식 연재되고 인기 배우를 주연으로 드라마화된 웹툰을 단순히 전문 직업인의 취미활동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실제로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의사 봉급보다 높은 수입을 올렸다고 밝혔다). 한 사람이 의사와 만화가라는 파이프라인으로 시너지를 낸다는 건 한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언밸런스한 조합도 크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유출이 있으면 당연히 침입도 있을 것이다. <내과 박원장>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끌고 드라마화가 확정된 웹툰(인스타툰) <전세역전>은 주인공이 부동산 사기를 당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담아낸 콘텐츠다. 그 안에는 각종 법률과 세금, 경매, 등기 같은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가득하지만,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변호사도 세무사도 공인중개사도 아니다. 오히려 업무 면에서는 이런 직업들의 정반대라고 느껴지는 작가 겸 시인이다. 자격 면허가 없는 사람이 돈을 받고 상담이나 중개를 해주면 위법이지만, 직접 경험하거나 공부해서 알게 된 내용을 콘텐츠로 만들어 돈을 벌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드시 전문대학원에 가거나 고시에 합격해야만 이런 소재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웹툰은 의사와 시인이라는 극과 극의 직업이 연결된 케이스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전문직의 끝에 있는 의사와 창작자의 끝에 있는 시인이 동시에 같은 일을 하는 세상에서, 그 외의 직업군이 벽을 둘러치고 하나의 우물에만 파묻혀 있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혹은 가능한 일일까?)     

나는 N잡러이고, 스스로의 직업이 몇 개인지 모른다. 우물의 개수를 정확히 셀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흥미와 전망을 따져가며 새로운 우물에 뛰어들거나 기존의 우물을 덮는 변화가 실시간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두 번째 이유는, 어떤 일을 직업으로 정의하는 기준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가작가 같은 일들은 비교적 쉽게 내 직업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어쨌든 번역서가 나왔고 책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성우는 어떨까? 나는 유튜브에서 책을 읽어주는 콘텐츠를 진행하고, 기업과 정식 계약을 맺어 오디오북을 열 권 넘게 녹음했다. 낭독으로 수입을 올린다는 점에서 보면 딱히 성우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흔히 이 직업의 관문으로 여겨지는 방송사 공채 시험에 붙은 적은 없으니, 제대로 된(?) 성우라고 보기는 애매한 게 사실이다. MC 같은 직업도 그렇다. 독서 관련 행사나 다른 작가의 북토크를 진행한 적이 있으니, 나를 MC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몇 번의 경험만으로 숟가락을 담그는 태도가 그 일을 본업으로 삼는 전문가 분들에게 실례가 될까? 매사에 생각과 고민이 많은 성격 탓인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앞서 내밀었던 작가나 번역가 명함에도 100퍼센트 확신이 있는 건 아니다. 신춘문예나 통번역대학원 같은 자격을 중시하는 누군가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프로의 문턱을 넘지 못한 아마추어일 테니까.    



 

나는 내 우물이 정확히 몇 개인지 모른다. 초반에는 숫자만 많고 이렇다 할 ‘대표주자’가 없는 직업 정체성을 두고 번뇌도 많이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집착을 내려놓았다. 직업이 몇 개면 어떻고, 누구에게 무슨 호칭으로 불리면 어떤가. 번역가든 아니든 작가든 아니든, 나는 원서를 옮기고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다. 성우든 아니든 MC든 아니든, 나는 책을 낭독하고 독서 행사를 진행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지금의 내게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그 일의 본질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어떤 직함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잘 모른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방법도 모르고, 성우 공채에 통과하는 방법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므로, 지금부터는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자격 대신 일을 따고, 직함 대신 경력을 쌓고, 궁극적으로는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하면서 살아가는 일상을 손에 넣는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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