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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Oct 02. 2019

제인, 앤, 작은 아씨들

<나와 작은 아씨들> 출간 전 연재


어른이 되지 않도록 머리 위에 다리미를 얹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꽃봉오리는 장미가 되고, 새끼 고양이는 어른 고양이로 자라나겠죠. 너무 안타까워요!


I wish wearing flatirons on our heads would keep us from growing up. But buds will be roses, and kittens cats, more’s the pity!     


-『작은 아씨들』 중에서     




『제인 에어』, 『빨강머리 앤』, 그리고 『작은 아씨들』. 1900년을 전후로 발표된 이 세 편의 여성문학에는 평행이론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다양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저명한 여류 작가의 작품이고, 매력과 개성이 넘치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며, 그 주인공들이 어린 소녀에서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나는 과정이 세세하게 담겨 있다는 점도 같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성장 스토리라는 면도 닮았으며, 전 세계 소녀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훌륭한 롤 모델을 제공했다는 유사성도 있다(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세 편의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의 두 작품과 『작은 아씨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제인 에어와 앤 셜리가 비현실적인 완벽함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마치가의 네 자매인 메그와 조, 베스, 에이미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은(솔직히 말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한) 친근한 소녀들인 것이다.     


제인 에어는 거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초인적인 자제력명석한 두뇌를 타고났다. 솔직히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비정한 친척들의 멸시와 학대 속에서 자라난 제인의 성장 과정을 생각하면 그녀가 스스로 책을 찾아 읽고 기도와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현명하고 침착한 숙녀로 자라났다는 것이 놀랍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라도, 로체스터 씨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요정인 줄 알았다’고 평했을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지니고 있다.     


차분하고 침착한 제인과는 전혀 다르지만, 앤 셜리 또한 현실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캐릭터이다. 앤의 어린 시절에 초점을 맞춘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면서 말괄량이 이미지가 강조되긴 했으나, 사실 그녀는 학교에서 늘 전교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자 요즘으로 따지면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퀸즈아카데미에 수석으로 합격하며 신문에 이름이 실릴 정도의 수재였다. 게다가 마음씨도 곱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심지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까지 많다. 이 정도면 그녀가 ‘엄친딸’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결점을 찾아보기 힘든 두 여인과 비교하면 우리의 작은 아씨들은 정말이지 빈틈허점투성이다. 메그는 허영심이 많고, 조는 다혈질인 성격을 가누지 못하며, 베스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에이미는 계산적인 면이 있다(그리고 철자법도 엉망이다). 실수의 규모와 파급력도 여타 소설의 여성 주인공들과는 급이 다르다. 메그는 분수에 맞지 않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사들이다가 가정 경제를 파탄 낼 뻔했고, 조는 막냇동생을 물에 빠뜨려 죽일 뻔했다. 베스는 기르던 카나리아를 방치하는 바람에 실제로 죽게 만들었고, 에이미는 홧김에 언니가 평생 써 모은 원고를 불에 태워버렸다.     


심지어 이러한 단점은 완전히 고쳐지지도 않는다. 잔인한 외숙모에게 품었던 복수심을 기도의 힘으로 극복한 제인 에어나 개구쟁이 소녀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여인으로 자라난 앤 셜리와 달리, 마치 부인의 네 딸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툭하면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질러서 곤경에 처하거나 후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곤 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빈틈 있는 삶은 어쩐지 아름답다. 실수를 저지르고 당황하는 모습은 인간적이고, 타고난 결점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완벽하진 못해도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대견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다독이고 지탱하며 불완전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는 그녀들의 모습에서는 밝고 따사로운 빛이 스며 나온다.     


아버지가 전장에서 부상당했다는 전보가 날아온 날, 조는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내다 판다. 간호를 위해 떠나는 어머니에게 여비를 마련해드리기 위해서였다. 가족들은 사내아이처럼 변한 조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지지만, 그녀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그들을 달랜다. 어차피 머리칼이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를 위해서 한 일이니 괜찮다고.     


하지만 바로 그날 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울음을 터뜨린다. 밤색으로 풍성하게 물결치던 자신의 리카락을, 에이미가 “조 언니에게 아름다운 데라곤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고 말하곤 했던 그 머리카락을, 그녀는 사실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이다.     


후회할 일도 생각하지 않은 채 덥석 머리를 잘라버린 일과 끝까지 ‘쿨’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침대 맡에서 대성통곡을 한 일. 훗날 어른이 된 조가 이 시기를 다시 돌아본다면, 어느 쪽이 더 부끄러운 실수로 느껴질까?     


제인과 앤이 비현실적인 로망의 영역에 속해 있다면, 실수투성이 네 자매는 현실적인 공감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롤 모델은 제인 에어나 앤 셜리가 아니라 작은 아씨들, 그중에서도 미워할 수 없는 다혈질 소녀인 조 마치다.







2019년 10월 16일부터 전국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나와 작은 아씨들> 단행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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