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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Oct 07. 2019

삶에도 가격이 있을까

<나와 작은 아씨들> 출간 전 연재



“그 소녀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온갖 훌륭한 계획을 세웠단다. 하지만 그 계획을 잘 지키기는커녕 언제나 ‘이것만 갖고 있다면’, ‘저것만 할 수 있다면’ 하고 불평하기 바빴지.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이야.”


“These girls were anxious to be good and made many excellent resolutions, but they did not keep them very well, and were constantly saying, 'If only we had this,' or 'If we could only do that,' quite forgetting how much they already had, and how many things they actually could do.”


-『작은 아씨들』 중에서




“부자 되세요!” 라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하게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약 20년 전에 방영된 한 카드회사 광고가 이 문장을 국민적인 유행어로 등극시킨 후, ‘부자’라는 단어는 ‘건강’이나 ‘행복’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인사말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물질적인 부가 건강 혹은 행복과 같은 급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몸과 마음의 고통 없이 하루를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나 평화롭고 의미 있는 일상에서 찾아오는 잔잔한 기쁨을 고급 아파트나 외제차, 모피 코트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를 추구하는 태도 자체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다. 나도 누가 외제차를 선물해준다면 넙죽 절이라도 올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타고 다닐 거니까(슬프게도 그런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건강과 행복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라면, 부는 누군가에겐 필요하고, 누군가에겐 필요 하지 않은 선택적인 가치이다. 그런 면에서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지도 않은 사람에게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음악에 관심도 없는 이에게 “피아니스트 되세요!” 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뜬금없고 무신경한 간섭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밖에서 지인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가끔씩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야,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네가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나는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수준의 절대 빈곤을 경험해봤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월세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하루살이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치과 견적서에 찍힌 금액을 보고 손이 덜덜 떨려서 한 달째 충치 치료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니까.


건강과 행복에는 분명히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이. 부자 동네에 우뚝 선 고급 빌라나 역세권의 브랜드 아파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몸 뉠 집 한 칸은 마련해야 하고, 자가용까지는 못 몰아도 버스비, 전철비 댈 돈은 있어야 한다. 미용 시술은 포기하더라도 아플 때 치료받을 병원비가 없으면 곤란하고, 매일 먹을 음식과 입을 옷도 따져보면 일일이 돈 문제로 귀결된다.


메그와 조가 고달픔을 꾹 참고 매일 아침 일터로 나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직후,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일을 해서 생활비를 보태겠다며 기꺼이 양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메그는 마을 부잣집 킹 씨네 집에 가정교사로 취직하고, 조는 까다로운 마치 숙모할머니 댁에서 수발을 들며 급료를 받는다.


두 사람이 벌어온 돈은 가족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일 아침 식탁에 올라오는 빵과 커피, 에이미가 학교에 들고 갈 공책과 연필, 베스가 성홍열에 걸렸을 때 필요했던 약값과 치료비는 모두 언니들의 노동의 대가로 나온 것이다. 빈말로라도 여유롭거나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메그와 조의 헌신 덕분에 마치 가족은 아늑한 난롯불이 있고 폭신한 양탄자가 깔린 집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껏 유복하게만 자랐던,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소녀들에게 갑작스레 시작된 사회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일해서 번 돈도 그녀들의 이상을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메그는 낡은 드레스 차림으로 친구들을 만나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고, 조는 소설책 살 돈이 없어서 마치 할머니나 로렌스 씨네 서재에서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돈 때문에 한숨을 쉬면서도, 그녀들은 결코 물질적인 부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사실 그녀들에게는 최소 한 번씩 부자가 될 기회가 있었다. 메그는 친척의 중매로 부잣집에 시집을 갈 수 있었고, 조는 신문에 시험 삼아 연재한 통속소설이 히트를 치면서 잠시나마 적잖은 돈을 만졌다. 그러나 그녀들이 고민 끝에 선택한 인생의 목표는 부유한 삶이 아니었다. 재산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한 가정을 꿈꾸던 메그는 가난하지만 다정하고 성실한 브룩 씨의 아내가 되었다. 자극적인 통속소설이 세상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는 연재 예정이었던 『쥐라산맥의 악령Demon of the Jura』을 벽난로에 넣어 태워버린 뒤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평생 소박한 삶을 살았다. 마치 숙모할머니와 샐리, 모펫, 그레이스를 포함하여 재산이 넘쳐나는 부자 캐릭터들이 작품 곳곳에서 눈에 띄지만, 내가 닮고 싶은 것은 여전히 건강하고 행복하며 소박한 메그와 조의 삶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열심히 일을 하며 지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도, 내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듣고 싶은 인사는 “부자 되세요!”보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요.” 쪽에 가깝다.




2019년 10월 16일부터 전국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나와 작은 아씨들> 단행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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