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도 바람도 아니다
현관 번호키는 연식이 있다. 클래식하거나 장엄하지 않다. 낡아 커버가 흔들거린다. 호미를 든 중세의 수문장 같다. 가끔 혼자 삐빅 삐빅 운다. 띠리링이나 스르릉보다 낫다. 버거워서 그런가 보다.
날씨가 득하다. 서둘러 번호키를 눌렀다. 삐빅 운다. 나야, 괜찮아. 천천히 버튼을 다시 누른다. 다섯 개의 수 조합. 그리고 별 버튼. 삐빅 삐비빅. 연속으로 경고음을 쏟는다. 인간의 언어로 컴파일한 삐빅은 '안돼'라고 들린다. 반항보다 거절처럼 들린다.
번호키에서 손을 뗐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보이듯 보이지 않듯 안고 가는 기억이 있다. 수천 번 반복 후 체득한 의식 아래의 기억. 육신을 잃어도 남겨질 기억. 그 기억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한다. 처음은 서툰 만큼 맹렬히 어딘가를 자극한다. 두려움이 아니면 좋겠다.
언젠가 나를 잃을 수 있는 걸까. 존재는 남되 기억은 소멸하는 걸까. 가능성은 두려움으로 변한다. 복수의 비등점을 뺏긴 치욕 같은 자극이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살아왔다.
인사를 나눈 사람이 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다. 기억도 자극도 두려움도 없다. 애쓰지 않아도 뱉어야 할, 어미처럼 중얼거릴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름일지 모른다. 기억하려 애쓰는 순간 두려움이 스멀거린다. 자극은 현실처럼 에인다.
포장을 뜯어 조심스레 꺼낸 웨하스 끝은 늘 부서진다. 약하고 여려 어쩔 수 없다. 기억은 웨하스가 아니다. 스치듯 지나간 일부가 모인 전부. 전부를 기억해야 일부가 존재한다. 부스러진 편린은 전부를 잃는다. 그래, 복잡해서 그래. 좀 힘들어서일 거야. 잠시 집중 못 할 때가 있잖아. 그런 걸 거야. 자극 대신 위로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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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어두워졌다. 숨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린다. 번호키의 번호를 잃었다. 잊은 것이 아닌 잃은 것이다. 잃는다는 것은 서럽다. 번호가 아닌 내 공간을 잃을지 모른다. 가늠할 수 없는 기억은 공포를 수반한다. 맹렬히 머리를 헤집는다. 쏟아진 기억이 뒤섞인다.
번호키의 암호는 네 자리의 수였다. 다섯 자리가 아니었다. 천 단위와 만 단위의 숫자 사이, 천 개와 만 개의 기억 사이, 9,999개의 기억은 어디서 왔을까. 어이없는 듯 웃지만, 갭만큼의 공포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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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아파야 했을 거라면, 다리가 아닌 머리가 아팠으면 좋겠다. 입이 아팠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았겠다. 뇌 주름을 펴거나 성대를 막거나. 후회도 바람도 아니다. 그냥 그랬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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