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가둔 말
시간이 지난다. 슬프든 기쁘든 지나간다. 새 바지가 불편해 버스에서 허리를 세웠다. 창 너머 햇살이 찌르지만 아득하다.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통화하는 아주머니 한 분. 무심코 본 그녀의 등에서 호통이 들린다.
"시끄러워!"
정적을 깬 옆 노인은 태연하다. 죽일 듯 그녀를 노려본다. 잘한 건 없는 아줌마. 노인의 일갈은 더 불편하다. 뻔뻔하고 저릿하고 저속하다. 베일 듯 공기를 압축한다. 타인의 모습에 투영될까 두렵다. 가슴이 저미겠지.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빛도 숨도 불편하다.
원마운트 정류장에서 노인이 일어선다. 다리가 아픈지 절룩거린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의 팔을 누군가 부축한다. 아까 통화한 그 아주머니. 팔짱을 낀 채 인도를 걷는 둘의 모습을 본다. 타인 아닌 가족이었구나. 부인 혹은 며느리 혹은 딸. 차라리 타인이 낫다. 뻔뻔 저릿 저속과 평생 함께 할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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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말고 들으면 좋겠다."
"뭐?"
"장인 묘소에 가고 싶은데 좀 알려주면 안돼?"
"......"
"한번 다녀가야 할 거 같아서."
"29일 토요일 점심에 별이네랑 갈거야."
"근처라며? 내가 가도 괜찮을까?"
"같이 가든지."
그렇게 톡을 보냈다. 5월에 돌아가신 분께 못다 한 말이 있다.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 산등성이 한 뼘 땅의 여물지 않은 봉분. 배례하고 술을 드렸다. 슬픈 척이 슬플지 몰랐다. '이제 말씀드릴게요 아버님.'
비석 뒷면에 아들 이름이 눈에 띈다. 그 옆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의아하나 물을 수 없다. 이제 말씀드릴 수 없겠구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비밀 하나쯤 당신도 있을 테니까. 삼킨 말을 큰절로 대신했다. 고통스럽지만 여러 번 했다. '아프지말고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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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아버지 산소를 떠올렸다. 꽃송이 하나 남겨져 있을까. 생각하는 걸 멈춘다. 생각을 멈추니 손이 굳는다.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오래 가둔 말이 샌다.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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