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에 붉은 소나기가 내리면 집으로 가는 길이 막막했다. 받아쓰기 시간, 분식점에서 본 대로 ‘떡복끼’라 적었다가 손바닥을 맞은 날이었다. 글짓기 대회, 그리기 대회 결과는 ‘대상, 최우수, 우수’로 줄 세워졌다. 월요일 조회 시간이면, 몇 아이들이 구령대에 올라갔다. 다부진 차렷 자세 뒤로 벗겨진 교장 선생님 머리가 보였다. “위 학생은 … 상장을 수여합니다.” 나는 매번 햇볕 아래서하염없이박수를 쳤다. 모든 시험은 승자와 패자를 남겼다. 쪽지시험, 진단평가, 학업 성취도 평가 등 여러 문제를 밥처럼 먹으며무럭무럭 자랐다.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앞두고 선생님이 말했다. “사람들이 너희 교복만 봐도 몇 등인지 알아. 실업계 교복 입으면 창피해서 버스 못 탄다.” 이듬해 내가 입은 파란 체크무늬 교복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자주색 옷깃에 금장 단추가 박힌 감색 교복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부천에 산다는 말에 누군가 “부천여고 나왔어요?”라고 반갑게 물으면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성과는 언제나 기대에 못 미쳤다. 아버지가 말했다. “따뜻한 밥 먹고주는 돈 받아가며, 공부만 하면 되는데그걸 못해?” ‘내가 대학은 갈 수 있을까, 취직은 할 수 있을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삶은 언제나 아득했다.
어려서부터 꿈이 뭐냐는 질문에 선생님이라 답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나운서에 자꾸 눈이 갔다. ‘난 별로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는데….’ 무턱대고 꿈꾸기 시작했다. 막상 소속이 사라지는 것은 두려워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낮에는 아나운서 준비생, 밤에는 대학원생, 주말에는 과외 선생으로 살았다. 세 마리 토끼는 날마다 자기를 더 봐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친한 친구에게 언론 고사 준비 사실을 겨우 알렸다. “나 아나운서 시험 준비해.” 그 말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네까짓 게 무슨 아나운서?” 비웃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걱정과 함께 얹어올 기대감도 무거웠다. 실패하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아이처럼 쿵쾅댔다.
여러 언론사 시험을 치르며 존재 자체가 바닥으로 꺼졌다. 아나운서, 기자, 캐스터 등 이것저것 기웃거렸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차라리 중고등학교 시절처럼 중간고사나 모의고사를 보는 게 나았다. 무엇이 틀렸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고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력서 광탈, 면접 탈락, 불합격 통지에는 설명이 없었다. 학벌이 문제인지, 얼굴이 문제인지, 언행이 문제인지, 내가 몇 점인지 몰랐다. 최종 면접에서 탈락한 날 밤, 모든 것을 파헤치다 오답 노트 빼곡히 ‘윤혜린’이라는 이름을 썼다. 내 인생의 오답은 ‘나’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착한 딸, 부러운 친구, 괜찮은 선배이고 싶었다. “공부 좀 하는 것 같더니 결국 그게 뭐냐?” 뾰족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대학원 졸업 후에도 행로가 정해지지 않자, 내가 사라지는 듯했다. 엄마에게 “나 사실 아나운서 준비 중이야”라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엄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숨죽이고 앉아 줄을 그을 수 있는 도서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함께 스터디를 하던 이들이 회사로, 유학으로, 결혼으로 자기 갈 길을 찾아갔다. 그해 겨울, “엄마, 나 아나운서는 포기하려고…” 말끝에 입술이 떨렸다. 엄마가 살며시 웃었다. “그게 될 줄 알았어? 기대도 안 했어.” 뒤통수를 맞았는데, 너무 시원했다.
사실 내 꿈 앞에는 늘 ‘글 쓰는’이라는 관형어가 붙어 있었다. ‘글 쓰는’ 선생님, ‘글 쓰는’ 아나운서. 흠이 갈까 차마 뱉지 못한 말, 나는 감히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갈 길이 아득했지만, 등단은 마지막 출구이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치열하게 읽고, 쓰고, 고치고 있었다. 신춘문예와 문학 공모전에 글을 보냈다. 전화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모르는 번호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택배, 보험, 대출 이야기를 들을 때의 허망함을 말이다. 실패자, 나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열심히 뛰면,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는 실패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서 완전무장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나라고, 실패는 성공 이후에나 말하라고 했다. 주저앉은 ‘나’를 나조차 안아주지 못했다.
갖지 못 한 꿈은 덫이 되었다. 나는 한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다. 아나운서, 작가라는 말에 손끝이 아렸다. 결혼과 육아로 정신이 없었지만, 여전히 ‘꿈’을 맴돌았다. 엄마로만 남은 내가 너무 초라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다시 버릇처럼 읽고 쓰기 시작했다. 직업도 명예도 놓아두고, 그저 ‘나’에 위해 썼다. 글 속에서 만난 ‘나’와 함께 울고더러는웃었다. 그렇게 모인 글은우연한기회에 책이 되었다. 몇 해 전부터 학교와 도서관에서 그림책, 글쓰기 강사로 일을 한다. 강사이자 작가,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삶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토록 ‘나’답다니.
가끔 악몽을 꾼다. 공부를 안 하고 시험을 보는, 준비 없이 평가를 받는,애타게 결과 발표를기다리는 꿈. 겨우 눈을 뜨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무의식은 아직도 경쟁 속에 있다. 학창 시절, “넌 꿈이 뭐니?”라고 묻는 대신 “밥벌이는 뭐로 할래?” 물었다면 인생이 조금은 수월했을까. 밥벌이를 꿈이라는 말로 포장해 놓으니, 낙오하는 순간 ‘나’를 영영 잃어버린 듯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뒤돌아섰다. 하지만 꿈은 교사, 아나운서, 작가라는 말에 담길 만큼 작지 않다. 꿈은 밥벌이를넘어서는 아주 큰삶의 면면이다.
이제 조금 안다. 결과만 본다면 실패였지만, 과정은 고스란히 내 것이었다. 슬픔도 아픔도 지나면 모두 따뜻했다. 요즘도 공모전에서 떨어지지만,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랑은 좀 안 맞나?’ 속은 좀 쓰리지만 가볍게 넘긴다. 경쟁은 게으른 나를 북돋는 수단일 뿐이다. 어떤 날은 미움에 사로잡혀 머리가 지끈하고 가끔은 사랑이 가득해 황홀하지만, 모두 기억되지 않음은 동일했다. 쓰는 것 말고 삶을 간직할 방법이 없었다. 글이 되는 순간, 내 안의 ‘나’는 다시 태어난다.글을 읽을 때면, ‘싫다 화난다 하면서도 잘 견뎠구나’ 오래된‘나’를 만난다. 내가 잊은 기특한 ‘나’, 지워버린 결핍된 ‘나’를 붙잡고 다시 일어난다. 글은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준다.
사실 나를 가장 매섭게떠민 사람은 ‘나’였다. ‘넌 정규직 교사도 아니잖아.’, ‘넌 아나운서도 못 됐잖아.’ 한계 짓고 규정하며 스스로의 말끝에 가슴이 베였다. 삶은 무겁고 거칠어서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하지만글이 되고나면 신기하게 흐뭇했다. 글과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그게 될 줄 알았어? 기대도 안 했어.” 그 겨울, 엄마의 웃음이 눈에 선하다.무거운 인생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살고, 읽고, 쓰고, 고친다.그렇게꿈꾼다 오늘도.